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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순자 수필

    한순자

    경기도 여주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기도 광수중학교 근무, 1992년 캐나다 이민, 캐나다문인협회 수필 부문 입상, 2006년 해외동포문학상, 작품집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나이만큼 행복한 여자>, <밀리언 달러 티켓 나도 한장>,<행복이라는 이름의 여행>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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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고마운 당신이었네

 

 가끔은 ‘자식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을 보면 그럼 ‘뭐는 마음대로 되더냐’고 반문하고 싶어진다. 살면서 과연 세상사가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되었던 것이 있었나 잠시 생각에 젖는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순간 선택하고 결정해서 실행에 옮기며 살고 있다. 그 중 삶의 중심추 역할을 하는 것이 학교, 결혼, 직장 문제 등일 것이다. 난 지금도 기억한다. 중학교를 시골에서 졸업하며 내 성적으로 서울의 어느 고등학교를 갈 수 있을까 고심했던 적이 있다. 


 그때 배화여고와 성신여고를 놓고 저울질을 하다가 성신여고를 지원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때 성신여고를 떨어졌거나, 배화여고에 지원을 했더라면 그 결과에 따라 오늘날 나의 삶의 방향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겠나, 그것은 우선 친구 관계가 가장 크지 않았겠나 싶다. 


 대학교는 내 삶이 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난 대학진학을 앞두고 전공을 뭘 해서 장차 뭘 해보겠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오로지, 장차 배우자를 만나려면 대학을 가야 한다 싶었고, 남녀공학을 가야만 했던 것 역시 결혼할 상대를 만나려면 남녀공학을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가득했다. 


 나 같은 시골태생은 혼처 구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기에 내가 대학을 가서 그때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대학교 3학년 때 만난 남편과 결혼을 해서 딸 둘을 낳고 살았다. 


 난 이따금씩 살아온 날을 돌아볼 때 그때 남편과 결혼을 했던 것이 참 잘했던 거야 싶어지는 순간이 많았다. 그것은 남편과 6년 교제하며, 군대, 직장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난 청혼조차 받지 못하고 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니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난 그 사이 맞선을 11번이나 봤었다. 웬만하면 그냥 시집을 가려고 했었던 거였다. 


물론 그때 취업을 하려고 시도를 해보긴 했으나 적극적이지 못했고 난 결혼이 늦어지는 것 같아 심적으로 초조해지는 그런 마음도 있었다. 그때 남편은 입영통지서를 받고 훈련소까지 갔다가 운 좋게 방위로 빠져 동사무소에 근무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우리의 만남은 지속할 수 있었던 거다. 


하지만 남편은 군복무를 마치고 나서도 직장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그러는 사이 대학원에 등록을 하긴 했으나 그것이 내게 정식으로 청혼할 그런 여건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직장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은 나 역시도 같긴 했지만, 그 시절만 해도 똑 같은 ‘백수’라 해도 남자가 느끼는 무게감과 여자가 갖게 되는 부담감은 많은 차이가 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랬기에 남편과 소원해지는 사이 난 시집을 가야 한다 싶었기에 맞선을 보게 되었었다. 


 그런데 우선은 외견상으로도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고, 사랑하는 사람이 가슴에 있었기에 맞선을 봐도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기도 쉽지 않았을 터인데, 아마 괜찮은 사람이네 싶어 결혼을 했었다면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뻔했네 싶은 생각을 할 때가 많았다. 


 사람, 특히 연인관계는 무 자르듯 그렇게 잘라낸다고 과거에 있었던, 가슴에 담겨 있고 남아 있던 흔적들이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이따금씩 TV드라마를 보며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조건 찾아 맞추어 결혼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과연 저 결혼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기도 한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기도 하겠지만, 내가 만약 남편과 결혼하지 않고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더라면 그 후 연락처를 알아내어 만나려 하지 않았겠나 싶기도 하니 그래도 내가 사랑했고, 사랑했던 남자와 자식까지 낳고 살았다는 사실이 참 고맙기도 정말 다행이었네 싶다. 


 중간 중간 살아 온 세월은 접어둔다 해도, ‘역이민’을 하려 한국에 나갔다가 그곳에서 살 수도, 다시 돌아올 수도 없는 최악의 상황에 처했을 때, 술이 만취가 되어 운전대를 잡고는 내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옆에, 앞에 가는 차량들을 향해 들이 받을 듯이 광란의 질주를 할 때, 그때 무슨 변이라도 당한다면 정말 삶이 엉망진창이 되겠네 순간순간 숨이 멎을 듯 머릿속이 하얘지기도 했었다. 지나 놓고 보니 그야말로 ‘죽을 운’을 넘겼네 안도하는 마음이었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기를 “물질을 잃는 것이 가장 적게 잃는 것”이란 말을 실감할 수 있었음은 캐나다에 다시 들어와 살며 그래도 살아지니 무사히 돌아올 수 있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느 날 남편이 갑자기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을 때 처음엔 얼마나 황당하고 기가 막혔나. 그런데 곰곰 짚어보니 그것도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역이민을 시도하던 해가 2000년이었다. 그때 남편이나 내게 무슨 변고가 있었다면 딸들 결혼은 물론이고 학교 공부도 마치기 전이었으니 나 혼자 ‘생계’를 꾸려가야 했을 텐데, 그 후 17년이 지나 2017년에 저 세상 사람이 되었으니 내 나이 올해로 70에 연금까지 타고 있어 그것만으로도 한시름 놓았네 싶다. 


 게다가 남편이 심장질환으로 사망을 했는데 자칫 투병생활을 할 수도 있었겠다 싶으니 정말 아쉽긴 해도 그래도 참 다행이고 고마운 마음이 든다. 


 난 그 동안 남편과 살면서 감기약 한 번을 사다 준 기억이 없다. 그만큼 건강하게 살았다는 얘기가 될 것 같다. 큰아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마 87년도인가 그 즈음 보약을 달여서 팩에 나오기 시작할 때 개소주라고 한 번 사다 줬었다. 그런데 먹지를 않아 냉동고에 넣어 두었다가 나중에는 다 버려버리고 말았다. 그랬기에 그 다음엔 보약이라고 한 번 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친구는 남편이 병약해서 가을철이면 인삼을 대 놓고 달여 대는 친구를 보며 그런 시중들지 않아 참 고맙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가끔은 꼭 짚어 말할 수 없지만 뭔가 모르게 마음속에서 두고 봐라 ‘벼르게’ 되는 날들이 있었다. 그럴 때면 나중에 나이 들어 앓아 눕기라도 하면 고운 마음으로 수발들 것 같지 않다는 마음이 도사리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남편은 내가 감기 기운이라도 있을 것 같으면 약부터 사다 줬다. 그러니 훗날 내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는 상황이 되면 남편이 기꺼이 해주겠지 안도하는 마음이기도 했다. 그런데 병수발은커녕 약 한번을 사다 주지 않았는데 그렇게 고맙게도 떠나 갈 수가 있는 것인지 참 미안하고, 아쉽고, 고맙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나도 남편처럼 그렇게, ‘잠자다가 자는 듯이’ 아이들 곁을 떠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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