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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순자 수필

    한순자

    경기도 여주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기도 광수중학교 근무, 1992년 캐나다 이민, 캐나다문인협회 수필 부문 입상, 2006년 해외동포문학상, 작품집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나이만큼 행복한 여자>, <밀리언 달러 티켓 나도 한장>,<행복이라는 이름의 여행>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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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종말은 없다(1)

 
 
다만 내 삶을 다하는 날이 
끝이며, 또 다른 시작일 뿐이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을 노는 동안 아버지가 중풍을 맞으셨다. 심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반쪽의 마비 증세와 말씀을 잘 못하게 되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실 형편도 못되었고 이따금 침이나 맞는 정도였는데, 어느 날 누구인가의 소개로 손끝에 피만 약간 뽑고 머리를 만져 병을 고친다는 얘기를 듣고 엄마 아버지가 다녀오신 며칠 후 아버지는 그 여자한테 홀딱 빠지셨던 것이다. 


 아버지처럼 대가 곧고 올 차신 분이 그 병을 고친다는, 일테면 ‘성주’라 칭하는 여자에게 완전히 심취해서 그 다음날로 우리 큰 동생과 같이 쌀 한 가마니를 가지고 가셨다.


 발단은 그 때부터 시작이 되어 있는 재산을 야금야금 팔아서 대기 시작했다. 하긴 아버지가 그 동안 종교를 가지셨던 분도 아니고, 식견이 넓어서 이런저런 상황을 아실 처지도 아니고,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그 자체를 고치기 위해 이곳저곳 찾다가 그쪽으로 쏠리게 되셨던 것이다. 


 며칠 다니시고는 여자인 성주라는 사람도 저렇게 자기 일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불우한 사람을 돕겠다고 애쓰는데 나도 좋은 일 좀 해봐야 되겠다 싶어 자꾸 빠지셨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소위 얘기하는 ‘사이비 종교’였던 것이다. 아버지하고 깊은 속사정 얘기야 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미루어 짐작컨대 아버지 몸도 성치 않고 7남매 중 맏딸 하나만 결혼을 하였으니 아이들마저 교육시키고 결혼시킬 일이 크게 걱정스러우셨으리라. 그러던 차에 집만 팔아서 갖다 대면 생활은 그쪽에서 책임진다 했을 테니 그 방향으로 마음이 기우셨을 것이다. 


 그래서 살고 있던 왕십리 집을 팔고 시골에 있던 땅의 일부를 팔아 화양리에 있는 대지 72평 건평 68평짜리 이층집을 구입하게 되었다. 우리 식구는 아래층을 쓰고 그 사람들은 이층을 쓰게 되었는데, 그때 이미 꽤 여러 가구의 병을 고치고자 해서 온 사람들이 있어 이층에서 한 세대가 방 1, 2개씩 쓰며 공동으로 생활하는 형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층은 방이 여러 개 있어 4가구를 따로 세를 주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 많은 식구들 밥을 아래층 부엌에서 하게 되었으니 아마도 몇 십 명분은 되었지 싶다. 얼마 동안은 아버지가 그 생활비를 다 대시는 듯했다. 그러면서 그 와중에 나는 그 집에서 결혼을 해서 그 집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즈음 유일하게 언니와 형부만 그 사람들이 사이비 종교요, 사기꾼들이니 모두 집에서 내쫓아 버리라고 아우성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아버지가 발을 빼기에는 너무나 많은 액수가 투자되어 있어 그 돈이 아까워서도 그들이 얘기하는 대로 그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시골에 있던 땅을 마저 팔아서 갖다 바치셨으니 이래저래 단념할 수도 없었다. 


 나도 결혼하기 전 1, 2년은 그곳에서 공주님 아닌 장차 큰일을 할 사람으로 대접을 받고 있었으니 알게 모르게 그쪽에 흡수가 되어 있는 꼴이었다. 그 식구 많은 중에 나만 햇빛 비치는 창문이 달린 방에 침대까지 들여놓아 주어 그것을 쓰다가 결혼하면서 그 침대를 가져가게 되었다. 


 그 침대는 처음부터 나를 주기 위해서 산 것이 아니고 ‘천지 공사’를 하느라 샀다고 한다. 그 즈음 성주가 무슨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천지 공사를 하며 하나씩 사는 듯 했다. 말은 천지 공사를 한다고 하지만 자세하게 모르는 나는 돈을 쓰기 위한 명분을 내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중에 대표적이고 내 기억에 있는 것은 침대와 까만 비로도 원피스에 손가락처럼 생긴 빨간 액세서리가 있었다. 까만 비로드는 사람의 내부, 내장을 뜻하는 것이고, 그 빨간 액세서리는 손을 뜻하는 것으로 법문을 띄워 천지 공사를 하고 나면, 그 동안 발달하지 못한 의술로 해서 고치지 못했던 병까지 고친다고 한다.  


 그 까만 비로도 원피스 또한 미혼 시절 즐겨 입었던 옷 중에 하나였다. 대부분 천지 공사를 한다는 명분으로 물건을 사서 일이 다 끝이 나고 나면 물건을 하나씩 나누어주곤 하는데 그 중에서 내가 받았던 것은 침대, 비로도 원피스, 분홍색 홈드레스, 사파이어 반지 등이었다. 


 또 성주가 주로 쓰고 사무실 겸 쓰는 방은 길이가 좀 긴 방이었는데 벽면 하나가 다 차도록 수족관을 설치해 놓고는 거기다 열대어나 잉어를 사다 넣곤 했는데 그 고기 또한 천지 공사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 천지 공사를 할 때면 어떤 때는 며칠씩 일어나지도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다 시피해서 나중에 나올 때면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밥상을 차려 가면 밥상에도 귀신들이 득실거려 무슨 주문을 외워야 귀신들이 다 물러간다고 들었다. 귀신은 밥상뿐이 아닌 길거리에도 귀신들로 가득 차 발길에 차인다고 한다. 


 또 한 가지 기억 중에 잊을 수 없는 것은 여자들이(10명 안팎) 단체로 파란색 한복을 맞춰 입고는 거기 식구들 모두 관광차를 대절해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런데 또 돌아보면 그때 그런 일을 어떻게 했지, 결혼도 하기 전, 내 나이 20대 중반이었는데 부끄럽기도, 용기가 대단 했네 싶기도 하다. 그것은 단체로 맞춘 한복을 입고는 집집마다 다니며 쌀이나 돈을 얻어 오기도 하였는데, 어느 날 하루는 나와 상조 엄마, 승현 엄마가 청와대까지 갔다가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되돌아 온 적도 있었다. 청와대를 갔었던 것은 성주가 그 날은 우리 셋이서 그 쪽으로 가라고 해서 가게된 것이었다. 


 성주가 얘기하기는 그것 또한 천지 공사의 일환이라고 하지만 내가 생각키엔 식구들이 많다보니 식량 조달을 그런 식으로 하려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도 해보았지만 몇 번 다니다가는 더는 할 수 없어 그만 두고 말았다. 


 언젠가는 내가 나갔다가 들어오며 딸기 껌을 한 통 사다가 드렸었다. 그랬더니 그런 것 모두가 내 자의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성주가 무슨 법문을 띄워 내가 그런 것을 가져오므로 해서 그것으로 통일을 위한 공사를 한다고 지나는 소리로 하니 자세하게 물어 볼 수도 없었다. 


 또 하나 잊히지 않는 것은 그때 그곳에서 언제부터인지 나보고 글을 써 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글을 쓸 줄도 모른다고 했더니 걱정하지 말라면서 성주가 법문을 띄워 내게 메시지를 주면 생각나는 대로 그냥 쓰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몇 번은 글을 써서 회의 시간에 읽곤 하였는데 어떤 때는 내가 쓴 글을 다 읽고 난 다음 돌아앉아 담배를 피우며 법문을 써서 그 자리에서 태우고 나서 나보고 다시 글을 써 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먼저 쓴 글을 조금 수정해서 주면 읽고 나서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하였다. 그 순간에도 무슨 법문씩이나 띄워 메시지를 주는 글이 그런 정도 밖에 되지 않는가 싶어 믿어지지가 않았었다.


 나뿐이 아니고 우리 아버지 역시 장차 국무총리가 될 것이며, 그때가 되면 아버지는 명필 이상일 것이라고 하니 아버지는 설레면서도 기대가 가장 크지 않았을까 싶다. 


 문제는 뭐가 된다 된다, 그 중 하나, 세상이 바뀌면 내일 집 앞에 사람들로 꽉 찰 것이며 성주를 모셔 감은 물론이요 우리 아버지나 다른 사람들도 중요 요직을 맡게 될 것인데 그런 능력 또한 전지전능하신 성주가 다 할 수 있게 할 것이니 하나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말 그대로 언제 종말이 올 것이며, 세상이 바뀌어 어찌어찌 되리라 해서 그때가 지나기를 거듭거듭 하는 동안 꽤 많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달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아무런 변화, 아무것도 달라지거나 바뀌는 것이 없고, 이미 아버지 수중엔 돈이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생전에 남의 돈 한번 써보지 않았고 빚이라는 것을 모르고 사시던 분이었던지라 집을 살 때 잔금까지 다 갖고 계셨는데 그 사람들이 잔금을 치르지 않고 은행 융자로 대신했던 모양이다. 그 후에 땅을 팔아 온 돈도 그 융자받은 돈을 갚은 것이 아니고 다 써버리고도 이제는 그 작은 집단생활도 계속할 수가 없게 되었다. 


 물론 우리 말고 병을 고치겠다고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일부는 직장까지 그만두고, 어떤 이는 집까지 팔아 갖다 바치고, 또 어떤 이는 치료비 조로 얼마간만 내는 듯했으나 우리 아버지의 피해가 제일 많았다. 


 나중에는 보다 못해 형부가 그 사람들을 다 내쫓다시피 해버렸다. 그들 말대로 그렇게 나쁜 짓을 해서 천벌을 받을 일이라면 내가 십자가를 지겠다고 형부가 들고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니 그때는 아버지 병환은 웬만큼 좋아졌지만 무슨 일을 할 수도 없었고, 게다가 그들이 집값으로 치러야 할 돈까지 다 쓰고 융자금까지 고스란히 안고 있었으니 그 집을 팔 수 밖에 없었다. 


 그 후에 이따금 듣게 되는 언니의 비난은 내가 받아야 할 몫이기도 하였다. 엄마나 아버지는 배우지 못해서 그런 사이비 종교에 빠질 수 있다지만, 대학까지 나온 너까지 동조를 했으니 그 책임은 거의 나한테 있다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삼우제를 지내는 날도 나는 언니하고 대판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나는 “출가외인인 네가 친정 재산 한 푼도 차지할 수 없이 되니 그러느냐, 왜 그렇게 난리를 치느냐. 엄마, 우리 집 장남도 아무 소리 없는데 왜 너만 나를 끝까지 걸고 넘어 지느냐”며 울며불며 싸움을 벌였다. 그 얘기는 그 후에도 몇 번을 더 언니한테 들어야만 했다. 


 그즈음 이따금 회의라는 것을 하였다. 식구 모두 모여 성주가 전달할 사항이 있다든지, 식구 중에 자기를 불신한다든지, 비협조적인 사람이 있다 싶을 때에 깨달을 수 있도록 간접적인 방식으로 얘기를 했다. 


 몇 번들을 수 있었던 “난(성주) 겉모습만 사람이지 신의 사신으로 세상에 내려 와 세상을 살기 좋게 하려 ‘천지 공사’를 하는 사람인데 어찌 이렇게 모르고 의심을 하느냐”며 안타까워하던 모습이 지금껏 생생하다. 


 분위기가 그렇다 보니 회의를 하는 그 순간에도 각자의 마음까지 꿰뚫고 있는 듯해서 마음이 편치 않을 때가 많았다. 때때로 바깥에 나가서 하는 행동 하나하나까지 다 알고 있어 절대로 성주를 배신하는 행위나 말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며,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으려면 성주가 하는 대로, 하라는 대로,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몇 번 그런 분위기를 감지하다 보니 어디를 가나오나 성경이란 거울이 앞뒤를 비추고 있고, 신적인 존재, 성주가 머리 위에서 마음까지 샅샅이 읽어 내고 있어 길을 걸을 때도 뭐가 휘휘 감기는 것 같고, 감시를 받고 있다 싶은 생각이 들어 자꾸 오그라들고 조여 오는 느낌은 마음까지도 생기를 잃어 가는 것처럼 편치가 않았다. 아마도 이 때 내가 경험한 그런 마음상태가 싫어 그 후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적극적으로 하지 못하고 겉돌게 하는 것 같다. 


 소위 사이비 교주들이 하는 얘기나 종교단체에서 하는 얘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교회에서나 성당에서는 그들처럼 무모하게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마음이 동하게 되면 얼마든지 하늘나라에 공덕을 쌓아, 죽어 영원히 하느님 나라에서 편히 살 수 있는 ‘천당 티켓’이라도 따 놓으려는 듯 물심양면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여유 있어 하는 경우엔 그 모두가 나보다 못한 이웃과, 더 좋은 일을 위해 쓰일 수 있기에 결코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하기야 돈을 많이, 헌금을 많이 내는 사람을 그에 맞게 대접해야 함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더러는 돈으로 못하니까 봉사를 한다고 대신하는 경우도 있고, 소위 ‘십일조’ 내는 만큼 복락을 주시리라 하는 얘기와, 헌금을 많이 하지 못해 불편해 하는 경우도 의외로 많은 것이다. 


 사람의 욕심이란 많이 해서 그 이상의 복락을 누리고 싶음이 인지상정일 터인데, 많이 못하고 보니 복도 많이 받지 못할 것이요, 사람대접 제대로 못 받나 싶어 마음에선 늘 목구멍에 가시일 수밖에 없다. 


 나중에 죽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잘 살기를 바라기보다는, 지금 내가 처해 있는 ‘현실’을 제대로, 살아있는 동안 세상살이, 세상구경 열심히, 진실하게 살아감이 제대로 사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전쟁이 날까봐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고, 게다가 예언자들이 얘기하는 지구의 종말론을 굳이 들먹일 필요가 없다. 종말이 오는 것이 확실하다고 해도 내 현실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더 잘 먹고, 마시고, 있는 대로 흥청망청 쓰고, 즐겨야 하는가? 아닌 것이다. 일 년 후, 이 년 후에 지구에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내 ‘현실’을, 내 일상생활을 그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어야 하고, 심을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현실을 성실하고, 착실하게, 바르게, 착하게 사는 길만이 내가 죽어 하늘나라에 간다 해도, 내가 행하고, 쌓은 것만큼 받을 수 있을 것이며,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설이나 환생을 믿는다 해도 또 역시 그대로 살면 되는 것이다.


 지구의 종말론을 믿고 싶어 하고 은근히 바라는 이들은 대부분 현실에 불만족하거나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느냐는 울분, 심하게는 한이 쌓인 사람일수록 또 다른 커다란 변화, ‘종말론’같은 것을 믿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 ‘기대 심리’ 같은 것이라고 본다. 


 믿는 이들은 죽은 다음이나, 혹은 지구에 종말이 온다 해도 하느님 나라에 가기를 원하며, 영원히 그곳에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크기에, 지상의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의 것에 마음을 두라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중 문제인 것이다. 


 이승에서의 삶이 순간, 찰나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어디 두 번 다시 살아 볼 수 있더란 말인가. 그러기에 때로는 살아 있음만도 가슴까지 벅차오를 때가 있는가 하면, 살아감이, 더더구나 더 나이 들어서도 살아야함은 두렵기도, 무서움증이 엄습해 올 때도 있다. 


 어쨌든 절대적인 것은 살아 있는 동안은 살아야 하며, 살아 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기상의 이변이나 천재지변은 있을 수 있으나 세상에 종말은 없다. 다만 그날그날 바르고 충실하게 살면 되고 내가 생을 마감하는 날이 끝이며, 또 다른 시작일 뿐이다. 


 경험에는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이 있다. 경험을 통해 우리의 삶이 쌓여가고, 사고의 깊이나 가닥이 잡혀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행동에 옮길 때는 간접경험을 통해 얻은 정보나 지식보다는, 내가 겪고 살아온, 직접 경험한 것들로 많은 부분 우리의 의식이 차지하고 있어 그것이 바탕이 되어 결정하고 행동함을 볼 수 있다. 


 난 이미 20대 중반에 사이비 교주한테 많은 부분 기울어 있었기에 그것이 내 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기인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민 오기 전 천주교에서 영세를 받기도, 또 가끔은 교회에도 나갔었다. 그런데 몇 번은 목사님 설교에 감동 받아 나도 작정헌금을 해야지 내 마음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음을 보고는, 이내 아니지. 그동안 아버지와 같이 잃어버린 재산이 얼마인데 아직도 이렇게 현혹이 되다니 하고 나를 일깨운 적도 있었다. 


 그뿐이 아니고 성당이나 교회를 가면 절박하고도 간절한 상황에서도, 기도가 되지 않는 거였다. 도대체 누구한테, 어디에 대고 소원성취를 빌고 있는 것인가 싶으니 나 자신이 민망스러워 기도조차도 하지 않게 된다.


 역이민을 하겠다고 서울엘 나갔다가, 그곳에서도 살 수 없겠네 싶어 다시 캐나다로 들어와야 하는가 너무도 막막한 상황에 처해있을 때, 전도사로 있던 친구가 새벽기도를 가자며 나를 데리고 갔다. 친구 생각엔 기도하는 가운데 앞으로의 진로를 잡았으면 하고 데리고 갔을 것이다. 그렇게도 절박한 상황인데도 기도는커녕 눈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기도 시간이 되니 그 많은 사람들이 무슨 고민, 사연이 그렇게 많은지 조용하게 앉아 있는 사람은 나뿐인 듯 했다. 모두 목소리를 내어 기도를 하기도, 울며 호소하듯 하기도 하였다. 그것이 바로 통성기도인 듯한데 난 기도의 응답은커녕 맨송맨송 아무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나오고 말았다. 


 상황이 그리 되다보니 교회나 성당에도 나가게 되지를 않는다. 그야말로 정신적으로 자유스럽지 않아 교회도 성당에도 나간 지 오래 되었다.


 믿는 이들은 주일날이 기다려지기도, 그 날은 만사 제쳐놓고 교회나 성당엘 다녀와야 마음 편하게 하루를 시작한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주일날 나가는 것이 심적으로 부담이 된다. 집에서 쉬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크다. 그러기에 아직은 심적인 불편함, 부담보다는 내 마음이 편한 쪽으로 그렇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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