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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20대 청년의 도전과 비극

 

 윤형철. 자신의 모든 것을 한국 정치판에 내던졌던 20대 청년이다. 이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기억조차 못하는 이름이다.

 1998년 4월, 부산의 한 지역구에서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열렸다. 전직 부산시장과 국회의원, 기업체 CEO, 현직 의사 등 모두 10명이 출사표를 냈다.

 

 당시 정치부 2년차 기자로, 군소후보들을 마크(전담 취재)했다. 윤형철 후보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몇 년간 자유기고가 등으로 활동했지만 냉정하게 평가해 국회의원에 출마할 정도의 지명도는 없었다.

 

 할머니, 동생과 함께 살던 윤씨에게 선거기탁금 1천만 원은 큰돈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모은 사실상 전 재산을 선거에 걸었다. “돈 안 드는 선거를 치르겠다”며 30만원으로 명함 크기의 홍보물을 만들고, 14일 동안 선거비용으로 44만 원을 썼다.

 

 대신 그는 선거기간 내내 발이 부르트도록 지역구를 누볐다. 봄 기운이 완연한 부산의 4월이지만 바닷가에 인접한 선거구 골목골목에는 아침저녁으로 ‘똥바람’이 어지간히 거세게 불었다.

 

 그는 정치지망생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수줍음을 타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영호남 지역감정에 호소하고, 조직을 끌어모아 세를 과시하던 다른 후보들과 달리 유권자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가 한 표를 호소했다.

 

 26살, 무소속 후보의 목표는 5%의 유효득표에 성공해 지정기탁금을 돌려받고, 돈 안드는 정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몸소 증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윤씨의 도전은 허망하게 끝났다. 투표자 5만5,700여 명 중 874표(1.6%)를 얻는데 그쳤다. 10명 중 7위. 그나마 그 지역에서 수차례 출마했고, “학교 동창생, 마누라가 다니는 개신교계 신도들, 군대 선후배, 관변단체 회원 지지자 표만 계산해도 대충 5만 명”이라고 큰소리치던 정치인 후보가 고작 700여 표를 얻은 것과 비교하면 전혀 의미없는 도전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윤씨는 보궐선거 개표가 끝날 무렵인 선거 다음날 새벽 1시30분께 부산시내 한 공원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공직자들은 부정한 돈에 손대지 말라. 기탁금을 찾게되면 태국 방콕의 잠렁 전 시장에게 보내달라”는 유서를 남겼다.

 

 짧은 시간이나마 안면을 트고, 안부를 묻던 또래 청년의 죽음은 신참기자에게 큰 충격이었다. 빈소를 찾아가 윤씨의 동생, 친구들과 마주 앉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주저리주저리 위로의 말을 건네기는 했지만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문상객이나 유족 모두 그 상황이 너무나 황망했기 때문이다.

 

 당시 선거에서 함께 경쟁했던 후보 몇몇은 윤씨를 추모하면서 천도재를 지내주는 등 고인의 뜻을 기억하려 애썼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고작 선거에 한번 떨어졌다고? 다른 이유가 있는 것 아니냐.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20여 년 전과 비교해 한국정치의 수준이 높아졌는지 의문이지만, 적어도 ‘현금 박치기’로 표를 사는 행위가 많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그 보궐선거 당시를 돌아보면 유력후보가 지지자를 불러모아 봉투를 살포한다는 제보를 받고, 선거관리위원회 직원들과 함께 출동했었다. 2층집 담장까지 뛰어넘으며 현장을 덮쳤으나 허탕만 쳤다.

 

 요즘은 대놓고 봉투를 돌리는 일은 거의 없다. 부정선거가 더 교묘해졌는지는 모를 일이다. 목숨을 내놓고 깨끗한 정치를 부르짖었던 윤씨가 오늘날 한국정치판을 지켜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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