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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의 건국 국부들(26)-제임스 매디슨(3)

 

(지난 호에 이어)

이 전쟁 중에 매디슨은 1812년 대통령선거에서 재선되었다. 제퍼슨의 국무장관 재직시 군축감소정책으로 군사력을 약화시킨 매디슨은 상원에 연방군 재정비를 부탁하고 군비를 위하여 자신이 극진하게 반대했던 중앙은행의 필요성을 느껴 1816년 미연방중앙은행을 재활했다.

전비를 위해 발행한 국채 이자 지불을 위해 제퍼슨과 자신이 없애버렸던 세금을 부활시켰다. 다행히 앤드류 잭슨같은 명장들이 육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영국국민들도 전쟁에 지쳤고 나폴레온이 멸망하고 프랑스에 대한 제재가 불필요하게 되어 양국은 1817년 12월 24일 벨지움 겐트에서 겐트조약(GHENT TREATY)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1812미영전쟁으로 양국은 영토소득이 없었고 영국과 함께 싸운 인디언들만 그들만의 국가건립 소망을 저버리게 되었다.

 

인디언 정책

워싱턴의 인디언 동화정책과 인디언 부족 소유의 토지를 매입하는 제퍼슨 정책을 따라 매디슨은 인디언추장들로부터 토지매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토지소 유욕과 동화정책에 대한 저항 때문에 미국은 1891년 강제로 원주민 자녀들을 부모로부터 분리시켜 기독교교단이 운영하는 인디언기숙사에서 미국식 교육과 영어를 가르쳤다. 성폭행, 강간, 매질과 영양실조로 희생되는 학생들은 육체적, 정신적 학대로 인한 고통을 호소했다.

참고로 캐나다는 맥도널드 초대수상에 의해 1879년부터 1978년까지 미국보다 앞서 인디언 강제기숙사를 운영하며 학대한 기록을 갖고 있다.

기숙사에서 탈출한 증인들은 어린 여학생들이 강간을 방지하기 위해 점호시간이 끝나면 모두가 같은 침대로 모여서 자야 했고 원주민어를 사용하면 양잿물로 양치질을 하는 벌을 받았다고 진술하여 국내인들의 치를 떨게 한다.

CBC는 2021년 5월27일 215명의 미명어린이들의 유해가 구교교단이 운영하는 BC주 캠루프스기숙사 소유지에서 발굴되었다는 경악적인 뉴스를 실었다.

기록공개를 거부하는 교단에 미온적으로 대응하는 트루도 수상의 정책에 반해 12명 이상의 국내 변호사들은 UN 인권위원회에 수사를 요청하고 있다. 수사의 귀추는 물론 15만명 중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발굴될지 전세계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은퇴와 사망(1917-1836)

1817년 대통령임기가 끝난 후 65세의 매디슨은 먼틀리에 담배농장으로 돌아와 농장을 운영했다. 의붓아들에게 맡겼던 농장은 관리능력 부족으로 운영손실을 거듭 냈고 연초가격 하락으로 매디슨은 재정적 파탄을 겪고 가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매디슨은 틈틈이 잭슨을 비롯한 재임대통령의 정책을 조언했다. 1826년 제퍼슨 사망 후 10년간 버지니아대 총장을 맡았고, 1836년 6월28일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모교인 프린스턴대와 버지니아대 그리고 미 식민지협회에 많은 유산을 남겼지만 부인 돌리(DOLLEY MADISON 1768-1849)에게는 3만 달러의 유산만 남겨 부인은 1849년 7월12일 사망 전까지 궁핍한 여생을 보냈다.

1794년 9월 15일 버의 소개로 매디슨과 결혼한 돌리는 남편의 내성적인 성격과 정반대로 활동적이고 가장 사교적인 미 대통령 영부인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매디슨가 묘지에 안장되었다.

묘지에는 미 헌법의 아버지라고 새겨진 동판이 미합중국의 마지막 건국국부를 상기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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