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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의 건국 국부들(22)-잔 제이(1)

 

 

국익을 위한 전쟁은 국가존립을 위한 필요악이다. ( 제이)

 

잔 제이는 미 독립 후 미국을 호시탐탐 노리는 영국의 재 침략을 방지할 수 있었던 능란한 외교가로 알려졌다. 전쟁을 피하기 위한 외교협상이 영국과의 저자세외교로 오판되어 인기 하락을 초래하게 되어 제2대 미 대통령 선거에 낙선되었지만 잔 제이는 벤자민 프랭클린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직을 지내지 않은 미합중국의 건국 국부로 추대 받고 있다.

 

 

성장교육

제이는 1745년 12월 12일 무역상 부호로 알려진 프랑스계의 부친 피터 제이와 홀랜드계 모친 메어리 밴 코틀란드의 10자녀들 중 7번째로 뉴욕시에서 태어났다. 생후 3개월 후에 제이 가족은 뉴욕주 라이농장으로 이주했다.

8세까지 모친으로부터 가정교육을 받고 3년간 교회학교과정을 마치고 계속 가정교육을 거처 14세에 킹스칼리지(현 컬럼비아대)를 입학했다. 1764년 우등생으로 졸업한 후 4년간 연수를 끝내고, 1769년 변호사 자격증을 획득하여 1771년 변호사 사무실을 차렸다.

제이는 한때 미국과 영국이 공존하는 체제를 제창했으나 1774년 이후 “미신대륙 정착인들의 재산권은 영국의 부당한 세금착취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미 독립운동의 전초가 되는 13주 지하조직의 요직을 맡으며 정치에 입문하였다.

 

미 연합상원 6대 대통령(1778-1779)

제이는 1776년 미 독립선언을 지원하고 뉴욕주 대표로 미연합 상원의원직을 맡으며 1777년 뉴욕주 헌법을 초안했고, 뉴욕주 지방법원판사직을 맡았다.

1778년 제이는 13주 미연상원을 대표하는 6대 대통령에 피선되었다.

미 연합상원은 연합정관에 의해 미 연합상원의장이 행정직까지 맡아 대통령이라 불렀고, 임기는 1년으로 1774년부터 1789년 미합중국이 건국되어 워싱턴 초대대통령이 취임하기 전까지 14명의 미연합 대통령이 취임되었다.

미연합상원은 외교, 군사, 경제 등을 관할했지만 미연합 대통령은 상원의원들의 다수의견을 따르는 것 외에는 권한이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미연합 정관은 미연합 상원이 13주로부터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독립전쟁 비용을 위해 지폐를 발행해도 지폐가치를 받혀줄 수 있는 재정력이 없어 인플레로 가치가 떨어져 독립군봉급지불을 포함한 군 보급에 만성적인 차질을 일으켰다.

따라서 제이는 각주에 세금을 부과하고 상업을 관장할 수 있는 중앙연방제도의 필요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유럽외교활동(1779 – 1783)

1779년 가을 제이는 재정적인 지원을 받기 위해 스페인 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 미 독립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스페인 정부는 제이를 만나주질 않았다. 끈질긴 지원요청 끝에 영국이 요크타운 전쟁에 패했다는 소식이 유럽에 퍼지면서 1782년 스페인으로부터 17만 달러의 차관을 기대할 수 있었다.

 1782년 여름 제이는 벤자민 프랭클린이 주도하는 미국과 영국간의 파리평화조약을 지원하기 위해 파리에 도착했다. 프랑스는 미국과 동맹국으로 참관했다. 회의진행 중 프랭클린은 제이의 제의를 받아들여 잔 애덤스, 헨리 로렌스, 윌리엄 프랭클린의 동의를 받고 미국은 프랑스를 제치고 비밀리에 영국과 합의를 한 후 프랑스를 설득하여 평화조약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제이는 영국대표단의 협력으로 로드 쉘번 영국수상과 직접담판을 하여 미 독립을 위한 평화조약을 약속 받을 수 있었다. 조건은 미국과 프랑스의 동맹관계를 중립으로 유지하고 미국은 영국과 무역을 통한 평화적인 유대관계를 유지하자는 계획이었다.

제이가 성공적으로 영국과 담판을 끝낸 후 프랭클린은 노련한 외교로 프랑스를 설득하여 1783년 9월 3일 미국, 영국, 프랑스는 미 독립을 인정하는 파리조약에 서명하였다. 애덤스는 영국과 담판을 성공시킨 제이의 능력을 칭송하였다.

 

페더럴리스트 페이퍼 (1788)

영국으로부터 독립이 되었지만 미 연합정관에 의한 미 연합은 중앙체제의 결핍으로 유럽강국의 재 침략을 방위할 국력을 키울 수가 없었다. 제이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알렉산더 해밀턴과 합류하여 제임스 메디슨과 함께 중앙연방제도를 도입하는 85편의 논문(The Federalist Papers)을 퍼블리우스 제목으로 1787년 10월부터 1788년4월까지 뉴욕주인디펜던트저널지에 연속 게재하여 미 연방헌법의 기초를 닦았다.

제이는 2편부터 5편까지 집필을 통하여 중앙 연방체제로 국방력을 강화하여 영국이나 프랑스의 재 침략을 방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가간에 이익을 위한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제이는 관절염으로 계속 집필을 못하고 64편에 “미 연방상원의 3분의 2의 다수결로 상원이 미 대통령의 행정권을 번복할 수 있어야 된다”는 논문을 한번 더 게재하여 미 연방이 부서간 서로 견제할 수 있는 체제를 도입하게 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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