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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의 건국 국부들(15)-알렉산더 해밀턴(2)

 

다수에게 주어진 권력은 소수를 지배하고, 소수에게 주어진 권력은 다수를 지배한다. (알렉산더 해밀턴)

 

(873호에 이어)

해밀턴은 요크타운전투의 특공대군지휘관, 유능한 변호사, 초대 미 재무부장관직을 겸하며 연방을 만든 정치인, 연합주의 정관을 미연방헌법으로 바꾸는데 공헌한 법률학자, 뉴욕 포스트신문 발행인,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경제학자 그리고 세계를 이끌어가는 미국의 중앙은행 금융체제를 만든 원조은행가로 알려졌다.

 

해밀턴이 미 대통령이 되지 못한 이유에 대해 타인들에 비해 문제해결 능력이 탁월하여 항상 주위사람들의 경계심을 일으켜 정적을 만들었고, 대통령 출마를 할 수 있는 좋은 시기에 유부녀 마리아 레이놀즈와 염문을 일으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으며, 아아론 버 미 3대 부통령과의 결투에서 총격으로47세 나이에 세상을 일찍 떠났기 때문이라고 역사학자들은 결론짓고 있다.

 

포병대 대위에서 중령지휘관으로

1775년 해밀턴은 대학친구들과 함께 콜시칸 미 독립 민병대에 자원했다. 독학으로 군사학을 익히고 진급한 해밀턴은 부하들과 함께 맨하탄에 주둔한 영국군을 공격하여 대포를 포획했다. 1776년 60명의 포병 중대를 만들어 대위로 승진하여 워싱턴 총사령관이 이끄는 독립군을 따라 와이트 플레인스 전투, 트렌튼 전투, 프린스턴 전투에서 공을 세워 워싱턴의 눈길을 끌어 1777년 워싱턴 총사령관 부관 중령으로 발탁되었다.

 

중요한 정보 작전업무 및 장성들과 미 연합 상원들간에 통신업무를 맡고 워싱턴이 바쁠 때에는 직접 결정권을 갖고 서명하는 권한도 갖게 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프랑스에서 독립군에 가담한 라파예트 소장과 친분을 맺었다. 워싱턴은 사적으로 라파예트와 해밀턴을 친아들처럼 대해 주었다.

 

1781년 요크타운 전투를 앞두고 해밀턴은 워싱턴 총연합사령관에게 전투지휘관 자리를 부탁했다. 소장의 보직을 중령에게 줄 수 없다고 거절했지만 떼를 쓰며 부관직 사표를 낸 해밀턴의 끈질긴 요청에 워싱턴은 해밀턴이 라파예트 사단장 지휘하에 3개 연대를 이끌고 철통같은 영국군 보루를 공격하는 허락을 하였다.

 

동년 10월 14일 달빛도 없는 캄캄한 밤에 콘월리스가 이끄는 영국군 9번 보루는 라파예트가, 10번 보루는 해밀턴이 맡아 동시에 선두지휘로 요새를 공격하였다. 해밀턴은 특공대들의 탄창과 탄약을 버리게 한 다음 총검만 꽂고 소리 없이 보루를 넘어 10분도 안 돼서 서너 명의 희생자로 영국 초병들을 항복시켰다.

 

라파예트도 요새를 점령했다. 10월 19일 콘월리스 영국 장군은 뉴욕으로부터 지원병을 기다리다 포격에 못 견디고 좁혀오는 미-불 연합군의 압력에 백기를 들고 투항했다. 이 소식은 미 신대륙은 물론 유럽까지 퍼져 해밀턴은 독립군 영웅의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미 독립전쟁의 승리를 가져오게 하였다.

 

미 연합정관을 미합중국 헌법으로

전후 1782년 뉴욕시로 돌아온 해밀턴은 6개월간 독학으로 변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했고, 뉴욕주 미연합상원으로 임명되었다. 다음해 사표를 내고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여 독립지지자들은 물론 왕당파 지지자들까지 변호하는 유능한 변호사로 명성을 떨쳤다.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미연방헌법설립회에 뉴욕주 대표팀으로 참가했다. 해밀턴은 미연합정관을 보완하는 헌법의 필요성을 6시간 동안 조리 있게 설명했지만 호응을 받지 못했다. 그는 제임스 메디슨, 잔 제이와 합작으로 연방주의자 논집( The Federalist Papers)을 편집하여 1777년 10월부터 다음해 7월까지 인디펜던트 저널지 등에 게재했다.

 

이 논집은 총 85개의 에세이로 이루어졌고, 그 중 51개가 해밀턴이 집필했다. 이는 미연방헌법 기초에 큰 영향을 준 가장 훌륭한 논집으로 알려졌다. 이의 영향력으로 워싱턴 헌법위원장은 1788년 7월 26일 미연방헌법을 30대 27의 다수결로 통과시켰다.

 

이로 인해 중앙 통제력을 갖는 미연방제도가 확립되었고, 각 주로부터 세금을 받아들여 연방 군병력을 키울 수 있게 되었다. 연방정부는 몬테스큐의 3권분립 체제로 연방정부 부처간에 견제 및 세력균형을 유지하게 되었다. 정부의 권력에 보호받을 수 있는 국민헌장은 후에 헌법수정안으로 보장되었다.

 

헌법제정 238년 후

해밀턴은 메디슨과 의견 충돌하면서 헌법본문에서 국민헌장 삽입을 제외시키는 큰 역할을 했다. 이유는 자제되지 않은 자유는 폭민정치를 유발하여 신생국 중앙정권유지가 불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헌법제정 후238년이 지난 2016년 트럼프는 저교육, 무직 또는 저임금 백인노동자들을 겨냥한 해결책이 없는 포퓰리즘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거짓과 허위로 미국을 인종 별로 갈라놓고 폭동과 역병으로 진통을 겪게 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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