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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억 칼럼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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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잃어버린 양 비유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를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12-14)

 

“너희 중의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 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4-7)

 

 

어린아이들도 많이 알고 있는 “잃어버린 양 비유”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타나 있는데, 두 복음서의 기록을 비교해보면 다소 차이가 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특별히 예수께서 이 비유를 들려주시는 배경이 다르다. 그러나 비유를 통해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동일하다. 


마태복음의 경우 “잃어버린 양 비유”를 들려주시는 동기는 제자들이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라 묻자, 예수께서 답변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이 이 비유다. 


누가가 말해주는 이 비유의 배경은 마태의 것과는 다르다. 주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비난하자 거기 대한 반응으로 예수님이 들려주신 것이 이 비유이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인들과 자리를 같이 하기를 꺼렸다(시 1:1-6). 바리새인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의롭지 못하다고 여기거나 죄인이라고 간주하는 사람들과는 상종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들에겐 죄인들과 어울리며 그들과 식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한 자리에서 대화하며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해서는 안 될 일을 한다며 비방한 것이다(눅 15:1-2).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말씀해주신 것이 “잃어버린 양 비유”다. 


예수님 당시에 양을 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그때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양을 칠만한 장소도 많지 않았고, 양떼를 먹일 수 있는 곳의 지형 또한 좋지 않았다. 고원지대인 산등성이로 양들을 몰고 올라가야 했는데, 목자들이 못 보는 사이에 무리를 이탈하여 가파른 산비탈을 타고 내려가다 양 옆의 계곡이나 협곡으로 들어가는 양들은 벼랑에서 떨어지거나, 수렁에 빠지기 쉬웠다. 


그렇게 되면 10미터 앞도 제대로 못 보는 양들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사나운 짐승들에게 잡혀먹거나 굶어 죽은 경우가 많았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목자들은 양이 하나라도 없어지면 그 한 마리를 찾아 험한 골짜기와 계곡을 샅샅이 뒤져야 했다.


그때 많은 유대인들은 양을 집단적으로 사육했다. 개인적으로 자기 소유의 양만을 친 것이 아니라 같은 마을 사람끼리 그들의 양들을 모아 노련한 양치기들에게 맡겨 돌보게 한 것이다. 


보통 백 마리로 이루어진 한 집단의 양들을 둘 혹은 세 명의 경험 있는 목자들에게 맡기면 그 마을의 단합에도 도움이 되고, 양들의 안전도 보장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목자들은 이른 아침에 그들의 양떼를 몰고 산 위에 올랐다가 날이 저물면 마을로 내려오기 전에 반드시 양의 수를 세어보곤 하였다. 


만약 한 마리라도 부족하면 없어진 양을 찾기 위해 목자 중 한 명이 주위의 협곡과 계곡을 비롯한 온 산을 샅샅이 뒤지며 다녔다. 나머지 목자들은 남은 양들을 지키며 기다리다 밤에 양떼를 몰고 산을 내려와 마을 사람들에게 상황을 알렸다. 그러면 온 마을이 걱정하며 애타는 마음으로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간 목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목자가 잃었던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오면 모두가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며 그를 맞이했다. 위험한 산속을 홀로 헤매다 무사히 돌아오는 한 마리 양은 마을의 경사요 기쁨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없어진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온 산을 구석구석 뒤지는 목자의 강한 책임감과 사랑의 마음이다. 그 당시 목자들은 없어진 양을 발견하지 못하면 밤을 새우면서까지 양을 찾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으며, 양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거나 사나운 짐승에게 회생되었다는 증거라도 확보하지 않으면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기에 마을 사람들은 안심하고 그들에게 자기네 소중한 양을 맡길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잃어버린 양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확실히 깨닫기 위해서는 이 비유의 배경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태에 의하면 제자들이 “천국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라 묻자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가리키며 “너희가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 말씀하셨다. 


그런 후 “누구든지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죄 짖게 하는 사람은 큰 맷돌 짝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 하시고, 들려주신 것이 이 비유였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은 세상이 아무리 가볍게 여기며, 멸시하는 천한 사람이라도 잃어버리기를 원하지 않으심을 밝혀주신 것이다. 


목자가 그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위험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듯이 하나님은 갈 곳 없어 방황하는 사람들 특히 연약한 믿음으로 인해 절망과 좌절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찾아 나서는 분이심을 알려주신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세리와 죄인들에게 둘러싸인 주님을 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사람이 죄인들을 환영하고 함께 음식까지 먹는다.”며 비난하자 예수님이 들려주신 것이 “잃어버린 양 비유”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기뻐하며 돌아온 목자가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자, 함께 기뻐합시다. 잃어버린 양을 찾았습니다.”라 외쳤다며 비유를 끝내신 예수님은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니라.” 고 말씀하셨다. 


그 시대에 세리들은 민족의 배반자로 낙인 찍힌 죄인들이었다. 종족인 유대인들에게서 세금을 징수하여 그들을 속박하는 로마정부에 바쳤으며, 많은 세금을 부당하게 부과하여 그들의 사리사욕을 채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리들이나 부도덕한 여인들은 유대사회에서 발붙일 곳이 없었으며,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이 가까이 오는 것조차 꺼렸다. 그런데 예수님은 동족으로부터 버림받고 멸시당하는 세리들과 죄인들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주기를 원하신다고 이 비유 속에서 선포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것을 큰 기쁨과 자랑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이 그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라 믿었으며, 이방인이나 그들 눈에 의롭지 못한 사람들은 멸망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들과 이방인들 그리고 그들이 죄인이라 여기는 사람들 사이엔 높고 두터운 장벽이 형성될 수박에 없었다. 그 장벽을 무너뜨리고 그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 안에서는 의인이나 죄인의 간격이 없어지고, 모두가 영생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 같은 사실을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나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니라.”(엡 2:14-19)라 들려주고 있다.


하나님은 멸망의 길을 걷던 죄인이 구원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보며 기쁨을 참지 못하신다. 회개할 필요 없는 아흔아홉의 의인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 한 명이 영생을 얻으면 기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죄 범한 사람들은 멸망 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대하며 예수님은 슬퍼하시며 분노하신 것이다. 


한 명의 죄인이 천국 문으로 들어서면 하나님과 천군천사들이 기쁨으로 맞이하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을 모르던 이들이나 비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그네들이 구원받는 것을 불만스러워 하던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이 오늘 날에도 우리들 주위에 적지 않다. 


예리하고 단호하게 다른 사람들의 실수와 허물과 잘못을 지적하며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이 그들에게 임할 것이라 외쳐대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라 믿는 의로운 사람들을 수시로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도를 어기며, 이 세상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영혼을 더럽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들 되어야 할 줄 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찾아 언제든지 길 떠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온 천하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멸망의 길로 가는 영혼을 찾아 세상 끝까지라도 가라는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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