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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억 칼럼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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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충실하고 지혜로운 청지기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 24:45-51)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주인이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1-48)

 

 

예수님이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울라가실 때 횐 옷 입은 두 천사가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고 들려준다. 그 날이 언제일지는 하나님만이 아시지만 그가 다시 오는 날까지 “깨어있으라.”고 예수님은 여러 차례 말씀하신 바 있다.


마태와 누가가 들려주는 “충실하고 지혜로운 청지기 비유”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시기 위한 것이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이 비유는 혼인집에 갔던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하신 예수님에게 베드로가 “이 비유는 우리를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모든 사람들에게 하신 것입니까?”라 한 질문에 예수께서 답변으로 하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기간을 정하지 않고 먼 곳으로 떠나면서 그가 없는 동안 집을 관리할 청지기를 선정한다. 그는 심사숙고하여 집의 종들을 잘 돌보고 감독하며 집안 살림도 잘 할 수 있는 충실하고 사려 깊은 사람을 고른다. 


일을 끝내고 돌아온 주인이 그 청지기가 기대했던 대로 종들을 잘 관리하여 집안 살림을 알뜰하게 한 것을 알게 되면 청지기를 칭찬함은 물론 자기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관리하는 중책을 맡길 것이다. 그러나 청지기가 그의 기대를 저버리고 주어진 임무는 제쳐놓고 친구들과 먹고 마시며 집안사람들을 못살게 굴었다면 주인은 그 악한 청지기를 엄하게 꾸짖고 문책할 것이라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가르치기 원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능력과 은사를 최대로 활용하여 예수께서 오시는 날까지 일하라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수행할 것을 원하시며 또 우리들이 그렇게 할 것을 믿고 계시다. 그래야만 인간을 사용하셔서 역사를 주관하시며 그의 뜻을 펼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바람을 충족시켜 드릴 수 있을 것인가? 요셉의 생애 속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한 총명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형들의 질투의 대상이 되어 17세 어린 나이에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는 신세가 된다. 야곱이 가장 총애하는 아들에서 이역 땅 애굽에서 노예가 되어버린 요셉은 그의 인생이 그처럼 비참하게 된 것은 하나님 탓이라며 하나님을 원망하며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혜롭고 총명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요셉은 그의 삶이 그처럼 망가진 데는 그가 당장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내재되어 있음을 믿었다. 그러기에 그는 애굽 왕 바로의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도 체념하지 않고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날 날을 기다렸다.


성실하고 충실한 요셉은 보디발의 집을 관리하는 청지기가 되었고,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그 당시 세계를 제패하던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을 온전히 그에게 맡기는 요셉을 그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실현시키시며,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사용하셔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원대한 뜻을 실현시키는 중추적인 인물로 만드신 것이다. 충성스러운 청지기 요셉에게 주신 하나님의 상급은 이처럼 큰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도 요셉처럼 의롭고 정직하고 충실하게 살면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우리의 삶을 바친다면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됨은 물론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주인의 기대에 충성으로 보답한 청지기가 받을 칭찬과 상은 크기만 하지만 주인을 배반한 청지기가 받은 질책과 처벌은 가혹하다는 것이 이 비유의 또 다른 핵심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우리만이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사명을 잊어버리거나, 가볍게 여기거나, 감당해도 좋고 힘들면 안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거나, 아예 무시해 버리기까지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주께서 오실 날까지 많은 시간이 있다고 믿기에 매일 매일을 안일하게 지내며 허송세월하기 때문이라고 예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신다. 악한 종이 속으로 주인이 오래 있다가 올 것이라 생각하고 동료들을 괴롭히고 술친구들과 먹고 마시다 불시에 오는 주인을 맞아 하게 된다는 말씀이 그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탄이 인간을 파멸시킬 부하들을 교육하면서 세상에 내려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든가 “지옥은 없다.”며 사람들로 하여금 죄악을 범하게 할 것이 아니라 “시간은 많으니 먼저 인생을 마음껏 즐기고 나중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현명한 삶의 자세다.”라고 가르친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 믿는 자들이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은 “서두르지 말라. 천천히 해라.”라는 “차차 마귀”의 음성이다. 오늘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며 세월을 보내다 주님의 날이 임하면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패배자가 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주가 맡기신 인생의 몫을 감당하지 못하여 받은 형벌은 책망이나 경고나 집행유해 정도의 가벼운 것이 아니다. 마지막 날 예수께서는 그의 신뢰를 배반한 자들에게 “외식하는 자가 받을 형벌을 내리시기 때문이다(마 24:51). 


예수님이 가장 미워하고 싫어하시는 것 중의 하나가 ”위선“이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구제행위나 사람들에게 경건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인정받기 위한 형식적인 기도나 금식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셨다(마 6:1-18). 


뿐만 아니라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며, 회칠한 무덤처럼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신랄하게 책망하셨다(마 23:13-36). 예수께서 그의 뜻 아닌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추구하며 그의 말씀을 경시하거나 배척하는 자들을 위선자들처럼 처벌하시는 까닭이 여기 있는 것이다.


“엄히 때린다.”(cut in pieces)의 의미는 그 옛날 사무엘이 사울이 사로잡은 아말렉 왕 아각을 “토막 내어 죽인 것”(삼상 15:33)이나, 수많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톱으로 켜서 또는 피부를 벗겨 죽인 것“(히 11:37)과 같은 끔직한 형벌을 뜻한다. 


유대인들이 가장 두려워한 형벌 중의 하나인 “출교”도 이 종류에 속한다. 다윗이 네 차례나 “악을 행하는 자는 끊어질 것“(시 37: 9, 22, 43, 38)이라 증언한 것을 상기해 보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책임을 회피하거나 감당하지 못하는 데 대한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신뢰와 믿음을 저버리는 대가는 이처럼 무겁고 크기에 이 형벌에 처해지는 사람마다 어둠 속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는 “사랑과 자비”는 측량할 수 없이 크고도 넓다. 이에 비례하여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시는 “공의” 또한 한없이 엄격하다. 이는 심판 날 공의의 하나님이 내리시는 선고는 무겁고 중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함으로 구원받은 축복에 감사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시는 모든 일을 최선을 다해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살면서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으려는 사탄의 필사적인 시도는 한시도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이 밀레도 바닷가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설교를 하면서 “내가 떠나고 나면 사나운 이리떼 같은 거짓 선생들이 일어나 그릇된 것을 가르쳐서 신자들을 꾀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할 것이니 정신 차리고 내가 3년 동안 가르친 것을 기억하라.”(행 20:28-31)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이 비유를 마치시며 예수께서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7-48) 하신 의미를 바로 깨닫고, 예수님의 뜻을 행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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