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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억 칼럼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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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적-무화과나무를 말리시다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만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 21:18-22)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 가셨다. 그가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이심을 당당하게 밝히시기 위함이었다(사 62:11; 스 9:9). 


성내 백성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 외치며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영접했다. 이 광경을 바라보면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증오와 질투는 더욱 커졌다. 거기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돈을 바꿔주며, 제물을 파는 장사꾼들을 다 몰아내시자 그를 죽이고자 하는 그들의 마음은 더욱 굳어졌다. 이를 잘 아시면서도 예수님은 태연하게 그에게 몰려오는 맹인들과 병자들을 다 고쳐주셨다. 그리고는 그를 극도로 미워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피하여 베다니로 가신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3키로 정도 떨어진 작은 촌락으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주께서 죽은 지 나흘 만에 무덤에서 살려내신 그들의 오빠 나사로가 살던 곳이다. 거기서 하루 밤을 지내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중 예수님은 길가에 있는 한 무화과나무로 다가가신다. 조반을 드시지 않으셔서 시장기를 느끼셨던 것이다. 


무화과나무는 감람나무, 포도나무와 더불어 유대인들의 삶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는 나무다. 무화과나무의 무성한 잎들은 피곤하고 지친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달고 맛있는 열매를 맺는 것이 그 나무의 특징이요 생명이었다. 사사시대에 그리심 산 속의 나무들이 무화과나무에게 그들의 왕이 되어달라고 하자 무화과나무가 “내가 어떻게 달고 맛있는 과일 맺는 일을 버리고 너희를 다스리겠느냐?”며(삿 9:12) 거절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무화과나무는 일 년에 두 번 열매를 맺는다. 첫 열매는 4월에 꽃이 피면서 달리기 시작하는데 이 열매들은 작고 써서 먹을 수 없다. 6월이 되면 꽃이 만발하고 잎이 무성해지며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리게 된다. 그런데 무화과나무가 마른 사건은 4월에 일어났다. 예수님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은 4월 15일이었던 유월절이 되기 며칠 전이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열매가 있는지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셨으나 “무화과 철이 아니어서 잎사귀뿐이었다.”(막 11:3)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시기적으로 열매가 없을 수밖에 없는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한 예수님의 처사는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과 공의에 어긋난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기적들이 사랑과 자비의 표현인데 무화과나무의 경우에는 파괴적인 행위였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품성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또 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저주가 끝나자마자 무성하던 무화과나무 잎들이 말랐다고 되어있지만,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11;14)하신 그 다음 날 나무가 “뿌리째 말랐다.”(11;20)고 기록하고 있다. 


같은 사건인데도 일어난 때가 “즉시”와 “그 다음 날”로 다르게 기록된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서는 권능을 행하지 않으셨다는 점도 문제로 대두된다. 이런 점들 때문에 무화과나무 사건은 많은 논란을 일으켜왔다. 그러나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소멸시킨 목적은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에게 경고를 주시며, 그들을 가르치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모든 의문은 해소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시어 죄악이 난무하는 세상에 오신 것은 죄로 인해 죽어가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감사와 찬양으로 영접하고 그의 충성된 일꾼이 되어 그를 섬겨야 했다. 하나님께서 인류구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선택한 민족이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오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멸시하고 증오하며 핍박하다 끝내는 십자가형에 처하는 천인공노할 죄악을 범한다. 


예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그들이 그 같은 용서받기 힘든 죄를 저지르기 며칠 전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사명을 수행하기는커녕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구세주를 죽이려는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보여준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계속적으로 철저하게 배반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그러면서도 그들은 모세의 율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그들 나름대로의 율법을 수없이 만들어 그것들을 지켜야만 생명의 길을 가는 것처럼 행동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제사를 드리고 예식을 행하는데 시간과 정성을 아낌없이 바쳤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대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한 그들의 사랑과 그의 뜻에 따르는 무조건의 순종이었던 것이다. 이 같은 하나님의 마음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을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는 말씀 속에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예수님의 눈에 비친 이스라엘 민족은 잎만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았기에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말리신 것은 그들에게 내려질 하나님의 형벌이 어떨 것인가를 보여주신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만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았던 것은 아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하나님을 슬프게 한 사람들이 많기만 하기 때문이다.


오늘 날에도 마찬가지다. 세계인구의 35 퍼센트가 기독교 신자라는 통계가 나와 있는데도 세상은 날로 혼돈과 죄악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은 잎사귀만 푸르른 무화과나무 같은 믿는 자들이 허다하다는 증거인 까닭이다.


무화과나무가 마르는 것을 보고 놀란 제자들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 묻자 예수께서는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니라.”들려 주신다. 동문서답 같은 말씀이라 여기는 이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계속적인 믿음의 기도를 통해 앞을 막아서는 환란과 핍박을 이겨내며 열매 맺는 인생을 살 것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믿고 간구하면 산이라도 바다에 던져지는 기적이 일어나듯이 믿는 자의 삶 속에서 불가능은 사라진다고 말씀하셨지만 성경 어디에도 기도의 응답으로 산이 옮겨졌다는 기록은 없다. 


그런데 예수께서 산이라도 옮길 수 있는 믿음의 기도에 관해 한 번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변화 산에서 내려오셔서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주신 후 그가 산 위에 있는 동안 악령에 사로잡힌 아이를 앞에 놓고 속수무책이었던 제자들에게 “만약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리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다.”(마 17:20)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높은 산이 믿음의 기도가 응답되어 바다 속으로 들어간 일은 역사상 없었음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 것인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극도로 힘든 일을 당하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산을 옮기는 것처럼 어렵다.”란 말을 하곤 했다. 따라서 예수님이 받은 줄로 믿고 간구하는 기도는 산까지도 움직이게 한다고 하신 것은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는 것을 강조하며 일깨워 주신 것이다. 


그렇다. 믿음의 기도 앞에 우리를 저지할 방해요소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아무리 간절한 기도도 우리가 간구하는 대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하는 그대로 응답되기도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이 변형되어 또는 응답되지 않음으로 응답되는 기도의 응답도 많기 때문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예수님의 기도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때 예수님은 인간의 죄 짐을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고통의 잔을 가능하면 마시고 싶지 않으셨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아버지, 할 수만 있으면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마 26:39)라 기도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피하고 싶으셨던 그 잔을 거두시는 대신 마시게 하심으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 아니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심으로 예수님이 수행해야 할 인류구원의 사명을 완수하게 하신 것이다.


달고 맛있는 열매가 풍성하게 달린 듯이 푸른 잎만을 자랑하던 무화과나무가 말랐듯이 입으로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며 위선과 기만으로 주님께 충성하는 척하는 이들은 파멸이라는 종착역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그런 슬픈 종말을 맞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믿음의 기도로, 다가오는 환란과 시련과 박해와 아픔을 극복하며 나가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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