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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억 칼럼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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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진 후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6-17)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막 1:31-34)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눅 4:40-41)

 


 예수님은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후 그녀가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드셨다. 그 후 예수님에게 필요했던 것은 휴식이었다. 그날 하루를 바쁘게 지내시노라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실 때 이미 몹시 피곤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조금도 쉬지 못하시고 베드로 장모의 열병까지 치유해 주셨으니, 조용한 시간을 가지시며 심신의 피로를 푸셔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예수께서 그 날 악령을 쫓아내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베드로 장모의 열병까지 깨끗하게 고쳐 주셨다는 소문이 사방에 펴지자 각종 병자들이 예수님이 계신 베드로의 집으로 몰려왔기 때문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는 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삶이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그런 기본적인 원칙까지도 적용 될 수 없도록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능의 손길을 원한 것이다. 문제는 어째서 그들이 예수께서 주무셔야 할 밤에 그가 계신 곳으로 몰려들 왔느냐다. 그 날이 안식일이었던 까닭이다. 안식일에 일 할 수 없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철칙이었다. 따라서 누구든지 안식일 준수 세칙을 어기면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그 세칙이라는 것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의 근본정신과는 거리가 멀거나 관계조차 없는 것들이었다. 안식일에는 생명이 위험하지 않은 어떤 환자도 돌볼 수 없으며, 마른 무화과 열매 두 개보다 무거운 것은 들고 다닐 수 없고, 병자를 들것에 실어 옮길 수도 없으며, 노약자와 거동이 불편한 이들을 부축하여 걷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원칙에 의해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불치의 병을 고치시는 것도 불법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안식일은 아침 6시에 시작되어 저녁 6시에 끝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저녁 늦게 베드로의 집으로 달려온 것이다. 시계가 없던 때였기에 그들은 저녁 6시를 하늘에 별이 세 개 나타나는 때로 정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베드로의 집을 수많은 병자들과 그들의 보호자들이 에워싼 것은 어두워진 후였다.

그의 자비와 능력의 손길을 원하는 숱한 사람들이 밖에서 기다리는 것을 알게 된 예수님은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가 온유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쳐주신다. 그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주무실 예수님이 아니신 까닭이다.


 예수님의 제자 된 사람들은 이 같은 자세로 주님을 섬겨야 할 것이다. 자신의 문제부터 해결하고 남을 돕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부터 돌보는 것이 섬김의 기본 원칙이며, 그것을 예수님이 원하시기 때문이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같은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힘과 용기와 능력을 주시며 그들의 문제까지도 해결해 주신다는 사실이다. 


 이 귀중한 진리를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고 피곤하고 지치며 청년이라도 넘어지고 자빠지나 오직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새 힘을 얻어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갈 것이요 달려가도 지치지 않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사 4029-30)라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수 많은 병자들을 일일이 만나 말씀으로 그들을 괴롭히는 악귀를 쫓아내시고, 손을 얹어 병마에 시달리는 이들을 고쳐주셨다. 마태는 예수께서 이같이 하신 것은 “인간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는 것”이 메시아의 사명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함이라 말해준다. 이사야가 실제로 한 예언은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하다 하였도다.”(사 53:4)이다. 


 계속하여 이사야는 하늘보좌에 앉아계시던 하나님의 아들이 그 같은 고난을 받으셔야 하는 까닭을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라 들려주고 있다.


 피곤하심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어둔 밤에 밖으로 나가시어 인산인해를 이룬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광경을 보며 우리는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주신 사명은 “배고픈 자들을 먹이고,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며, 병든 자를 고쳐주고, 상한 자를 싸매주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아 나서라.”(켈 34:4)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예수님의 권능의 말씀과 능력의 손길에 의해 악한 귀신들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불치의 병으로부터 해방되는 사람들을 대하면서는 예수님 앞에 나오는 이들은 모두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의 능력의 말씀에 굴복하여 그들이 지배하던 사람들에게서 쫓겨나가는 귀신들이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압니다.”라 소리 지르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잠잠 하라” 명하신다. 그 날 아침 회당에서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을 고치실 때도 귀신이 조용히 물러나지 않고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는 당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심을 압니다.”(막 1:24)라 항의 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귀신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있다.”고 말했고, 예수께서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발설하지 말라.”하신다. 어째서일까?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검은 독수리 깃발을 휘날리며 이스라엘을 식민통치하는 로마정부를 몰아내는 정복자였다. 그러기에 그런 인물이 동장하는 순간 유대인들은 그를 앞장 세워 로마정부를 뒤집어엎을 혁명을 일으킬 마음의 준비를 가추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지도자로 삼고 로마의 속박에서 벗어나려 항거할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예수님은 그런 사태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각가지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허덕이는 인간들을 영원한 낙원으로 인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싸워서 굴복시키는 정복자 아닌 죄 범한 인간의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해 대신 죽음으로 이기는 구세주로서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그 안식일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하신 일은 많기만 했다.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을 마귀의 쇠사슬에서 풀어주시고, 중풍에 걸려 평생을 누워있어야 할 병자가 자유롭게 움직이며 살아가게 해주셨으며, 고열에 시달리며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여인을 주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각종 질병으로 인간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숱한 사람들을 인갑답게 살게 해주신 일들을 그 날 하루에 하셨기 때문이다. 


 그날 예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심을 깨달았어야 했다. 무력으로 로마정권을 몰아내어 이스라엘을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처럼 세상에 우뚝 서는 나라로 만들 메시아 아닌 인간을 멸망으로 향하는 죄의 길로부터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구주이심을 깨달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하며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들이 원하는 바를 얻자 그것으로 만족하고 제각기 그들이 갈 길로 가버렸다.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들을 평안하고 안락하게 살게 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파멸의 길을 걸어가던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하기 위함이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목적”인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원하는 바를 얻고 성취하기 위하여 예수 앞에 나갈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영생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그의 뜻을 이루어 드리며, 예수님을 섬기며 따라가는 우리들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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