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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배우는 기쁨(47)

 
 
(지난 호에 이어)
Toynbee는 Spengler 혹은 Marx의 결정적 모형(Deterministic Model)에서 벗어나 역사의 변화에는 방향이 없다고 주장했다. 


Spengler는 문명은 생애 말기가 오면 사라진다고 했다. Marx는 사회 변화는 공산주의를 향해 변한다고 했다. 토인비는 이러한 주장을 반대했다. 토인비는 “문명은 자살을 안한다. 문명의 죽음은 타살이다” 라고 주장했다.


그러면 문명이 왜 죽는가? 토인비는 도전(Challenge)-대응(Response) 모형으로 설명한다. 그는 23개의 세계 주요 문명을 연구했다. 그는 이집트, 인디언, 마야, 서구, 한국/일본, 아랍, 힌두 등을 포함한 23개의 문명을 연구했다. 


그의 설명은 문명은 어떻게 태어나느냐부터 시작한다. 일정 공동체가 외부의 침략, 감응 등의 위기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도전에서 새로운 문명이 탄생한다. 하지만 도전이 지나치게 어려우면 문명은 무너진다. 


반면에 도전이 지나치게 용이하면 그 문명은 침체한다. 즉 도전은 적합한 수준에 있어야 한다. 도전에 대한 대응에 따라 문명변화의 내용과 방향이 다르다. 토인비가 주장하는 모형의 주체는 도전장을 던지는 극소수의 엘리트들이다. 이들 엘리트들의 행위에 따라 문명은 번성할 수도 있고 멸망할 수도 있다.


문명의 멸망은 문명의 통치 미흡 혹은 환경 때문이 아니다. 멸망의 원인은 소수의 도전자들이 스스로 만족하면서 다음에 오는 도전을 극복하는데 실패함으로 일어난다. 


문명은 소수의 도전자들이 창의성을 상실할 때 일어난다. 문명이 멸망할 때에는 내부 프로레타리아(Internal Proletariat) 와 외부 프로레타리아(External Proletariat)가 생긴다. 


문명의 구성원 대부분이 지배한 소수의 억압을 받으면서 문명내의 협조정신, 연대감, 역동성, 창의력 및 생산성이 빈약해진다. 또한 문명 외의 공동체가 억압을 받으면 문명간의 마찰이 발생하여 문명의 멸망을 가속화 시킨다. 문명이 멸망하면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과거 지향적이 되고 공동체에 대한 흥미가 약해진다.


토인비의 또 하나의 견해는 회교문명, 힌두문명 및 극동문명은 서구문명에 흡수 된다고 했다. 하지만 서구 문명도 우주적 문명이 되면서 후퇴하여 멸망할 수도 있다고 했다.
기독교 역사관은 근본적으로 목적적(Teleological) 역사관이다. 즉 역사에는 뚜렸한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역사는 시작(Beginning)이 있고 마지막(End)이 있다. 그리고 역사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목적 달설을 위해 달린다.


 이러한 역사관은 Augustine이 제시했고 그 후 많은 신학가들이 체계화 했다. 한국인 신학가로서는 박용기 목사(성경적 기독교, 2010)가 기독교 역사관을 상세하게 체계화한 대표적 신학가다. 


하나님은 문물을 창조하시면서 인류역사를 시작 하셨다. 그리고 역사진전의 과정을 정하셨다. 이와 같이 기독교 역사관은 비기독교 역사관과는 다르다.


 비기독교 역사관은 역사의 변화 방향이 없다. 있다 하더라도 목적이 없다. 그리고 비기독교 역사관에는 종말이 없다. 비기독교 역사관의 문명은 끊임없이 헤맨다. 


더 중요한 차이는 비기독교 역사관은 인본주의적 역사관이라면 기독교 역사관은 하나님 중심의 역사관이다. 기독교 역사관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류역사를 분명한 목적을 위해 시작하게 하시고 시간이 종말될 때 인류역사를 마무리 하신다. 그리고 심판 하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것들을 선이든 악이든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전도서 12:13)


구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역사를 보여준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다. 이 역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우르 지역을 떠나라고 명령하시는 순간에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스라엘 나라를 언약 하셨다. 이 언약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이스라엘 민족역사의 시작과 전진 방향을 의미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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