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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를 읽다가

 

 

 소개


 
‘한국 현대사’ 저자 브루스 커밍스는 젊은 시절 한국에 평화봉사단으로 일한 인연이 있어 ‘'한국 전쟁의 기원’을 쓰기도 했다. 한국현대사의 일제 말 부분을 읽던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또는 우리 기억에 그리 멀지 않은 애잔한 이야기가 있어, 식민지 시절에 재능 있는 조선인들에게 있을 수 있었던, 또는 보통의 조선인에게 있었던 가슴 아픈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야기1) 조선인 최초 판사


일본정부의 조선인 최초 판사가 된 이찬영은 판사 생활 10년째 조선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봉착했다. 사형선고를 내렸지만 그 경험이 너무 괴로워 사직하고, 엿장수가 되어 3년간 시골을 떠돌아 다니다가 금강산에서 승려가 되었다(당시 39세. 부인과 2남1녀의 가정을 두고). 훗날 효봉스님이라는 법명으로 당대 유명한 선승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1966년 78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야기2) 위안부 할머니


김복동은 부유한 지주 집안의 6녀 가운데 한 명이었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 문맹이었던 어머니는 1941년 동네 이장과 일본 군복을 입고 온 조선인에게 설득 당해 딸을 공장에서 3년간 일하도록 동의했다.


김복동은 비슷한 방법으로 모집된 20여명의 여자와 함께 타이완으로 갔다. 다시 중국 광동으로 갔다. 거기서 군의관이 검진을 한다며 그녀의 옷을 벗겻다. 세상 물정 모르는 이 처녀는 수치스러웠다.


김복동은 한 위안소로 갔다. 군인들을 상대했다. 저항하면 때리고, 음식을 주지 않았다. 하루 15명, 주말에는 50명. 군인들은 모두 콘돔과 전표를 들고 왔다. 그녀는 전표를 모았다가 일본 관리에게 넘겨 주었다. 위안부들은 일본이 승리하면 돈을 주겠다는 말을 들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여러 '구락부'에서 온 50여명의 여자와 함께, 수라바야의 제 16 육군병원의 간호보조원으로 배치됐다. 
거기서 1년 이상 생활하다가 고향에 와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다른 가족들이 모두 일본으로 가버리는 통에 혼자 남아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들 중에 위안부로 일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쟁 때 만났던 그녀의 친구들 중 몇 명은 아직도 생계수단으로 매춘을 하고 있었다.

 

 이야기3) 원폭 생존자


유준승은 4명의 가족과 함께, 한 농부의 초가집 부엌 옆 작은 온돌방에서 살고 있었다. 1917년 정읍에서 태어난 그는 1944년 징용되어 해군공병작전에 투입 되었다.
1945년 8월6일 오전 8시, 히로시마 역 근처에서 유씨가 자기 시계를 들여다 보고 있을 때, 눈을 멀게 하는 뜨거운 섬광이 그를 휩쌌다. 그는 역 뒤의 후쯔바 산으로 미친 듯이 달렸다. 산 자락에 도착해 그날 밤 반쯤 무너진 농가에서 지냈다.
그리고 다음날 구조 트럭에 의해 쿠레에 있는 해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기름에 적신 거즈를 얼굴에 덥고 누워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화상을 입은 자리에 구더기들이 슬었다. 
1950년경, 그는 피를 토하고 혈변을 누기 시작했다. 몇 년 후 그의 아내는 동수라는 아이를 낳았는데 하체는 전혀 발육되지 않았다, 또 다른 아이는 하체가 똑 같이 작았지만, 머리는 보통 아이보다 두 배나 컸다. 이 아이는 3개월 후 죽었다.
유씨는 채소장사로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으나, 1968년경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1972년 그는 55세 이었음에도 유령처럼 여위고, 밀랍처럼 하얀 얼굴로 초가집 부엌 옆 작은 방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1분 간격으로 오는 통증에, 그때마다 사지가 비틀려서 고통을 참기 위해 다문 이를 갈았다. 유씨는 몇 달 후 죽었다.
 아들 동수는 사춘기기 되자 3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다. 아버지가 죽은 후 그는 미쳐서 1년이 못되어 죽었다.

 

 이야기4) 조선 시인


이원록은 일본지배에 저항하다 17번 투옥되고, 1944년 베이징 일본 헌병대 지하 감옥에서 기다리던 해방을 보지 못하고 40세에 생을 마친다. 수인번호가 264여서 필명이 ‘이육사’ 이다.

 

 

 ‘광야’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가슴 아픈 나라 잃은 백성의 이야기이다. 미 군정시, 하지 초청으로 서재필이 왔다. 그는 갑신정변 후 미국으로 피신해 최초의 한인 미국 의사가 됐다. 그가 귀국해 첫발을 디디면서 모여든 신문기자에게 “비누 한 장 못 만드는 나라에서…”라고 한다. 나라 없는 슬픔, 가난한 서러움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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