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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병선의 大佳里(대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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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찾아사(43)-슬픔의 길,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1)

 

인류의 역사상 아직까지 단 한번 밖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 중, 제일 마지막에 일어난 부활의 역사가, 인간들이 세월의 흐름을 기록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달력의 한계와 아집 때문에, 그 한번뿐인 날짜가 매년 바뀌게 되어, 천주교와 개신교에서는 2021년 부활주일이 4월 4일 이 되었고, 동방정교회에서는 5월 2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렇듯 매년 바뀌는 부활절이지만, 이 부활이 있기까지의 마지막 한 주간의 고난 기간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는 귀한 시간들입니다.

오늘날에도 고난주간이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하여 걸어가는 길이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라틴어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는 “슬픔의 길”이라는 뜻으로,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으신 수난의 길을 말합니다.

지난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에 잡혀 대제사장 가야바 앞으로 끌려 가시었지만, 생사여탈권이 없는 대제사장이기에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며, “안토니아 요새에서 송사할 때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걸으시던, 그리고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처형 후 무덤에 장사 지내기까지의 전 과정을 말하는 이 길”은, “복음서에 근거한 역사적인 길” 이라기보다는 순례자들의 신앙적인 길로써, 1294년 리칼두스 신부에 의해 대략 위치가 정해졌다고 하는데, 그 후 1540년경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에 의해 확정된 약 800 m의 길입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길과는 실제적으로 다를 수도 있으나, 이 길을 걷는 동안 우리에게 무한한 감동과 의미를 안겨주는 것은, 이 길이 예수님께는 고난의 길이요 제자들에게는 슬픔의 길이었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생명의 길이었고, 구원의 길이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꼬불꼬불 이어진 좁은 골목길은 수많은 인파가 줄줄이 이어졌고, 그 주변에 늘어선 장사꾼들의 호객 소리로 골목 안은 무척 소란하였습니다. 거기에다 시작하기 전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주의 사항! 소매치기 조심, 단체에서 떨어져 미아 안되도록 조심하라고….

이 두 가지를 지키려니 정신은 세 군데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여기 온 목적이 무엔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 체취를 느끼며 고난에 동참해 보려는 것이 아니었나요? 오랜 기억을 위해서는 사진도 찍어야 하고….

그러다 보니 “나” 에게도 고난의 길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비교조차 가당치 않은 고난이었지만…. 하긴 “호산나”를 외치던 인간들이 며칠 사이로 무섭게 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를 외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변덕이기도 하니까요.

제1지점과 제2지점은 본디오 빌라도의 재판정(Praetorium, 마 27:11 ~ 14)이 있던 안토니아 성채 안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당시의 로마 총독부는 가이사랴에 있었으나, 총독들은 유월절 기간 동안에 자주 일어났던 유대인들의 반 로마 시위를 진압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와 있게 되자 헤롯 대왕이 그의 친구 마가 안토니를 위해 지은 안토니아 성채에, 당시의 총독인 빌라도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의 기록 순서를 보면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에서 밤을 지새운 후 총독 빌라도에게 끌려가 1차 심문을 받은 곳이 성채 안 광장이었습니다. (추정이 되는 넓은 광장에 현재는 아랍 초등학교가 담장 너머에 있고 나누어진 마당 안에 “선고 교회”와 “채찍 교회”가 있습니다.)

유대 총독인 빌라도가 왜 저간의 사정을 모르고 있었겠습니까? 유대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잘 알았기에 명절을 빌미로 놓아주고자 하였으나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요 19:12)라는 유대인들의 말에 자신의 안위가 흔들릴까 겁을 먹고 “돌을 뜰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예수를 십자가에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요 19:13~16)

사형 선고를 내리면서도 마음이 개운치 못한 빌라도는 “손을 씻으며 이르되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 27:24)고 하며 그 죄를 유대인들에게 넘기려 하였으나 끝내 그의 최후는 비참하여, 로마에 묻혔던 유골은 스위스의 깊은 산골로 이장된 후, 그 산 이름이 필라투스 산이 되었습니다.

그 후 바로 옆의 제2지점으로 끌려가 가시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혀 희롱한 곳에

지금은 1903년에 재건축된 선고 교회” (Church of Condemnation)와 그 왼쪽으로 “작은 형제 수도원”과 “채찍 성당”이 있습니다.

이 곳에서부터 성채를 나와 수많은 군중들의 조롱을 받으며 도시의 거리를 지나 골고다로 향하셨습니다.

제3지점은 온갖 태형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너무 힘들어서 처음 쓰러지신 곳입니다. 십자가의 무게와 모양에 관하여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으나 사람 하나를 매달아야 했으니 아마도 상처 난 몸으로 지고 가기에는 벅찰 만큼 굵고 길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쩜 나무 십자가의 무게보다도 우리들의 죄와 불신의 무게가 더 무겁고 아팠겠지요.

그 자리라고 생각되는 곳에 1856년에 세워진 아르메니안 기념교회가 서 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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