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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개선문(2) -세베루스 개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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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세워진 개선문은 포로 로마노에서 캄피돌리아 언덕으로 오르는 길목에 옛 모습 그대로 서있는 세베루스 황제의 개선문(Arco di Settimio Severo)이다. 개선문의 앞면과 뒷면을 가득 메운 정교한 조각들은 많이 마모되었지만, 개선문 윗부분에 여러 줄로 길게 음각으로 쓰인 라틴어 문장만큼은 확실히 보인다. 


이 긴 라틴어 문장이 “국가의 일체성을 되찾고 로마 시민의 제국을 확장했기 때문에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와 그의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에게 헌정한 것” 이라며 이 개선문이 세워진 동기를 알려주는 문구란다. 


그의 아들인 카라칼라는 포악한 황제로 귀에 익은데, 막상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우리들의 귀에 익지 않은 이름이다. 로마제국 사상 최초의 아프리카 출신 황제가 된 세베루스는 북아프리카 렙티스 마그나(현재의 리비아 트리폴리) 출신으로 회계 감사관, 호민관을 거쳐 법무관으로 선출되어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시칠리아 등의 총독으로 부임하는 동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콤모두스 황제 밑에서 공을 세워 191년 판노니아와 일리리아 지방의 사령관이 되었다.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암살당한 뒤 내란 속에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페르티낙스를 율리아누스가 살해한 후 황제로 자칭하자 뒤이어 시리아 총독 니게르, 브리타니아 총독 알비누스도 서로 황제임을 자칭하는 일대 혼란이 일었다. 


황제 자리는 하나인데 셋이서 저마다 황제라고 하도록 이 당시의 정치판도는 힘으로 좌지우지 되었던 모양이다. 이때 세루비스는 7대 군단 4만2000명의 군사를 거느린 알비누스와 공동 황제로 즉위하는 조건으로 연합하며 12개 군단 7만 2000명 중 2개 군단을 로마로 내려보내 율리아누스를 살해한 후 로마에 입성해 근위대를 해산시켰다. 


뒤이어 시리아 총독이며 황제로 자칭한 니게르를 대파하고 추격대를 보내 유프라테스 강 근처에서 살해했다. 그리고 197년 2월 19일 배로 불어난 대군을 이끌고 리옹 근처의 평원에서 알비누스와 전투를 벌여 승리함에 따라 알비누스가 자결하고 세베루스가 단독 황제가 되었다.


세계를 제패한 로마이고 보니 그 중심, 로마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동맹과 배반을 쉽게 할 수 있는 권모술수와 더 강력한 군사력을 겸비하여야만 가질 수 있는 자리가 황제 자리였던 모양이다. 그러니 후에 “군인 황제시대”라는 말이 만들어 졌지!


황제가 되어 내정을 정비한 후, 199년 동방 원정을 개시해 티그리스 강변까지 쳐들어가 파르티아군을 간단히 격파하고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속주화 했다. 


이 원정의 개선으로 203년 포로 로마노의 마지막 건축물인 세베루스 개선문을 세웠으며 이후에는 본국에 머무르며 각종 공공 시설 개발사업을 벌이다가 205년 근위대장 플라우티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결국 아들을 황제 감으로 보지를 않았다는 이야기일 텐데, 이를 안 아들 카라칼라가 플라우티아누스를 살해하며 정적을 제거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210년부터 칼레도니아 전역 제패를 목표로 브리타니아 원정을 감행하다가 211년 2월 4일 에부라쿰에서 사망하며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 두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세루베스 개선문이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와 그의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에게 헌정한 것”이라고 하였으니 그 두 아들도 잠깐 드려다 보기로 하자.


세베루스는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 사이의 반목이 심각한 것을 알고는 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하도록 유언했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카라칼라는 게타와 로마를 공동으로 통치했지만 1년 후, 어머니 율리아 돔나 앞에서 동생을 살해하고 동생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정당방위로 그를 죽였다고 원로원에 공포했다.


그리고는 동생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사람들은 모조리 처형하고, 동생에 관한 기록과 형상들을 모두 지우고 파괴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개선문 윗부분에 새겨진 문장 중 네 번째 줄에 쓰여 있던 동생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다른 말로 대체해버렸던 흔적이 개선문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세베루스가 죽은 후 로마에서는 카라칼라가 황제 주치의로 하여금 아버지를 독살하도록 했거나 아니면 아버지를 직접 죽였을 거라는 소문이 퍼질 정도로 카라칼라는 난폭한 성정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었나 보다. 


카라칼라(Caracalla)란 이름 자체도 본명이 아니라, 켈트족의 전통적인 모자를 뜻하는 황제 자신의 별명이었단다. 본명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한번에 2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 최대의 목욕탕을 짓고, 212년 로마 제국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칙령을 발표하는 등, 재위기간 동안 로마 제국의 몰락에 일조하다가 결국 217년 암살을 당했다. 그래서인가? 요즈음도 “성이 문란해지며 목욕문화가 발달하면 나라가 망할 징조”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들이 어찌 보면 이조시대의 궁중 암투를 보는 것보다도 더 자주 일어난 권력쟁탈 내전이 있었던 로마인데… 로마는 이후 오래지 않아 동서 로마로 나누어 진 후에 서 로마가 먼저 망하기는 하였지만, 이러면서도 1,000년 이상 수많은 유적을 만들며 세계를 쥐락펴락 할 수 있었는데… 반만년 역사를 가졌다는 우리는 같은 반도 국가이면서 무엇을 하였었나?” 왜? 누가 답을 할 수 있을까?


개선문의 꼭대기에는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개선마차에 올라탄 황제와 그의 두 아들을 조각한 청동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개선문에 부조 되었던 화려한 승리의 감동도 형체를 알아 보기 힘들도록 세월에 부식되어 가며 말없이 1800년의 세월 무상을 전해주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영화는 풀 잎에 내렸던 이슬 같은 것이라고… 그래도 오랜 세월 후에 이 개선문을 본 따서 만든 카루젤 개선문이 파리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자신의 승리를 뽐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는 변함이 없는가 보다. 

 

 


   

 

 

그는 그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제명대로 살다간 황제였다. 18년 동안 로마제국을 통치했는데,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다 이루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헛된 일이었다”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마치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읊었듯이… 아직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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