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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로마(1) -콜로세움 3S의 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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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떠오르는 것이 한쪽 벽이 부서진 채로 위용을 자랑하는 콜로세움(Colosseum)이다. 서기 70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949년 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해 10년 뒤에 아들인 티투스 황제가 완공한 거대한 원형 경기장으로 많은 관광객들의 로마 관광 시발점이 되는 곳이다.


자! 우선 콜로세움을 둘러보면서 이제는 미이라가 된 로마의 심장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


원래 이름은 로마제국의 3번째 왕국을 이룬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성을 따라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으로 유대나라의 멸망이 건설의 단초를 주게 되었다.

 

 

 

 


AD 64년 유대 총독으로 부임한 게시우스 플로루스는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신전에 바쳐진 헌금을 압류하자 이에 반발하는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걷잡을 수 없는 폭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마사다 요새를 지키던 로마 주둔군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로마군을 공격하여 기세를 잡은 후, 예루살렘에 남아 있다가 항복한 로마인들을 모두 살해하고 말았다. 


반란의 여파는 다른 지방으로 점점 더 거세게 퍼져 나가며 상황이 복잡하게 전개되자 유대를 관할하는 시리아 속주 총독 케스티우스가 직접 군사행동에 나섰으나 그의 군대 역시 유대의 북부를 평정하고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하던 중 반란군의 기습으로 완전히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네로 황제는 제국 내 다른 곳에서도 유사한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을 우려해, 영국 원정을 통하여 군사적 명성을 얻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정예부대를 맡겨 빠른 진압을 지시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이끄는 군단은 북부 갈릴리 지방에서 반란군의 강렬한 저항을 받았지만, 한 달 반 만에 방어선을 뚫고 동굴에 숨어 있던 반란군 지휘자 요셉 벤 마티아스(Joseph ben Matthias)의 항복을 받을 때 요셉으로부터 그와 그 아들 티투스가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티투스의 막료로 종군하게 하였다. 

 

 

 

 


한편 로마군이 예루살렘 포위망을 좁혀 들어갈 때 로마에서는 네로가 죽고 갈바가 황제가 되자 전쟁은 잠시 중단되며, 아버지를 대신하여 티투스가 신임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러 로마에 가던 사이에 오토가 황제가 되었다. 


뒤이어 비텔리우스가 오토를 누르고 황제가 되자 오리엔트 군단은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니까 요셉 벤 마티아스의 예언이 빈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비텔리우스가 제거된 후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로 건너갔고, 아버지로부터 예루살렘 공략을 일임 받은 티투스는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요셉 벤 마티아스는 티투스 곁에서 예루살렘 공략전을 지켜보며 유대인들의 항복을 중재했지만, 결사항전을 외치는 이들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예루살렘 성은 넉 달 동안 계속된 포위를 견디지 못하고 함락되었고, 유대인들의 구심점이던 예루살렘 성전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말았다. 예루살렘 성 안 구석구석은 무자비한 살육으로 아비규환을 이루었고, 목숨 붙은 자들은 노예로 팔려가거나 티투스의 개선행렬에 끌려 로마에 노예로 끌려갔다.


요셉 벤 마티아스는 후에 베스파시아누스로부터 자신의 씨족명을 하사 받아 이름을 라틴식의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로 바꾸었는데, 항복 후 전쟁에 함께 다니며 본 바를 기록하여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유대 역사서 “유대 전쟁사”를 집필한 요세푸스, 바로 그 사람이다.


 세리(稅吏)였던 에퀴테스 계층의 로마인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의 아들로 태어난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가 된 후 원로원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며 선정을 베푸는 동시에 네로의 호화방탕한 실정 이후 자주 교체되는 황제들의 죽음과 등극으로부터 시민들의 관심을 돌리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돌과 화산재를 이용한 시멘트 콘크리트 기법을 사용하여 높이가 42.38m, 둘레 532m에 이르는 엄청 큰 원형경기장을 네로 황제의 황금 궁전(도무스 아우레스)의 정원에 있던 인공 호수를 메운 자리에 세우기 시작하였다. 즉 그 당시 정객들이 사용하던 “빵과 서커스”에서 한걸음 나아간 발상이었을 것이다. 


요즈음도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국민들의 이목을 다른 곳으로 옮기며 집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3S방법", 즉 스포츠(Sports), 섹스(Sex), 스크린(Screen)을 사용하지 않는가? 그 당시에는 스크린이 없어 Live Show를 하였으니 아마도 더 자극적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열리는 검투사 경기를 보러 찾아 드는 관객이 5만여 명이나 되었다니까! 


검투사들은 보통 노예나 전쟁 포로들 중에서 실력이 출중하고 용맹하게 잘 싸우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서로 결투를 벌이거나 다양한 종류의 동물을 사냥하며 로마 관중들을 즐겁게 해 주었단다.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늘 죽음이 따르는 일이었으나, 승리를 거둔 검투사들은 영웅 대접을 받게 함으로써 영웅심을 고취시키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으니까. 


경기장은 또한 해상 전투를 재현하여 어떻게 로마가 승리하였는지를 보여주며 정부 홍보를 하기도 하고, 고전극을 상연하는 무대로도 사용하도록 지어졌다. 현대인들에게는 경악할 내용이겠지만, 볼거리로 제공되는 이른바 '수간 쇼' 라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크레타 여왕 파시파에(미노타우르스를 낳은 여성) 역을 맡은 여죄수가 황소에게 수간을 당하고, 다이달로스 역을 맡은 죄수가 날개를 잃고 경기장 바닥에 추락해 온몸이 뭉개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출처 로마제국, 쾌락의 역사 p300-302.) 


다시 말하면 로마판 3S 종합 공연장이었던 것이다. 비록 베스파시아누스가 시작은 하였으나 그 덕을 하나도 보지 못한 원형경기장이 되었지만….


콜로세움은 608년까지는 경기장으로 사용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성당이나 궁전 등의 건축에 사용될 자재의 제공 터가 되었다. 


교황 니콜라오 5세(1447 – 1455)가 대성당을 짓는 데 필요한 2,522개의 돌을 콜로세움에서 가져오도록 허가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1505년, 교황 율리오 2세가 옛 건물을 헐고 화려한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설할 때에도 돌을 가져오라 허락하여 결국 많이 허물어진 모습을 보이게 되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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