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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희택아! 뭐 하니?” “왜?” “아니, 별일 없으면 같이 부여로 바람이나 쐬러 갈까 해서…” “좋지!” 이렇게 통화를 끝내고 우리는 다음날 아침, 상봉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만났다.

그 여행은 첫 직장에서 얻은 첫 휴가였다. 함께 여행한 친구는 같이 군대 갔다 와서 함께 복학한 절친인데, 우리는 원래 서로 사는 곳이 달라 그리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다.

그는 부천 토박이고 나는 신당동에 살아서 강의실에서나 눈인사할 정도였는데, 군대 훈련소에서 만나면서부터 친하게 된다. 당시에는 군대에 간다고 하면 동창들이 모여 송별회를 해줬다. 나도 그 친구의 송별 자리에 갔다.

“희택아, 너는 언제 군대 가냐?” “나, 5월 6일에 가지” “그래, 나는 7월 1일 가는데…” “그러면 잘하면 훈련소에서 만나겠네” “그럼, 너 네 집 주소 알려줘. 내가 훈련소에서 편지할게”하고 군대에 입대한다. 그 친구는 해병대, 나는 해군에 지원했는데, 당시는 해군, 해병이 함께 진해 경화동에서 훈련 받았던 시절이다.

 군대 간 친구에게서 “입소한 날 저녁에 식사 끝나고 화장실 가는 시간이 있어. 그때 화장실로 내가 찾아 갈게”라고 편지가 왔다. 훈련소 첫날,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약속대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화장실에 갔는데, 먼저 온 20여 명이 모여 볼 일도 보고 몰래 담배 피우느라 북새통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이 노~무 새끼들 전체~, 꼰아~ 박아!” 하는 소리가 들렸다. 화장실에 있던 훈련병들은 얼떨결에 모두 그 자리에서 ‘원산폭격’을 했다. 훈련소 내에서는 금연이었기에 조교들이 가끔 순찰을 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모두들 조교한테 들켰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잠시 후, “황현수~, 황현수! 있나?” ‘뭔 일이지?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네’. 나는 머리를 박은 채로 “네. 접니다” 하고 대답했다. “일어나, 이리 와 봐” 해서 부르는 곳으로 갔다. 그렇게 나를 부르는 사람은 바로 희택이었다.

그는 8주간의 훈련으로 민간인에서 깡다구 해병으로 변해 있었다. 주위가 어두웠지만, 눈은 빤짝였고 온 몸이 짙은 구릿빛으로 한눈에 봐도 강인해 보여 솔직히 친구지만 조금 무서웠다. 순간 속으로 ‘내가 반말을 해도 되나?’ 할 정도였다.

그는 나를 화장실 뒤편으로 데려가더니 PX에서 사 온 빵과 소시지, 담배를 준다. 그곳에서 우리는 10여분 동안, 지린내를 맡아가며 ‘평생 전설’이 될 이야기를 나눈다. 주 대화 내용은 2개월 선임의 훈련소 요령과 군대에서 잘 지내는 법 등의 ‘족집게’ 과외였다.

다시 여행 이야기다. 우리는 부여까지 가는 직행버스 안에서, 그 훈련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하며 갔다. 그러다 친구가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부여는 왜, 가려고 해?”

나는 “뭐. 특별한 이유는 없고, 군대 있을 때 회식하면 술 먹고 ‘두만강’, ‘낙동강’ ‘백마강’ 노래를 메들리로 불렀잖아, 그런데 두만강은 북한이어서 못 가구, 낙동강은 군대 있을 때 진해에서 가 봤고, 백마강 어디에 있는지 꼭 한번 가보고 싶었어”.

군대에서는 이런 뽕짝 메들리를 자주 불렀는데, 노래 반주기가 없던 시절이어도 그때는 가사를 어찌 그리 잘 외웠는지 모르겠다. 젓가락 두 개 만 있으면 장단을 맞춰가며 강 노래가 끝없이 이어졌다. 두만~ 푸른 물에 젓는 뱃사공…’을 거쳐 낙동~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 군인 오라버니…’ 를 지나면 ‘꿈꾸는 백마강’이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에서 울어나 보자/ 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면은/ 구곡간장 올올이 찢어지는데/ 누구가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구나”

 그때는 술 한잔하고 무심코 부른 ‘백마강’이지만, 이 노래에는 서글픈 사연이 몇 담겨 있다. 낙화암에 얽힌 의자왕과 삼천 궁녀의 이야기다. 다른 하나는 1940년, 일제의 강점기에 만들어진 이 노래는 발표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지만, 백제의 멸망을 떠올리게 하는 가사의 내용이 일제하에서 신음하는 우리 민족의 암울한 현실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라며 금지곡이 된다.

또 하나는 작사가 조명암에 대한 것이다. 조명암은 1930년대부터 시와 극작 활동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지만 1948년 월북하여 남한에서는 금기의 인물이다. 충남 아산이 고향인 그는 ‘꿈꾸는 백마강’뿐만 아니라 ‘알뜰한 당신’ ‘바다의 교향시’ ‘세상은 요지경’ ‘무정 천리’ ‘목포는 항구다’ ‘선창’ 등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알려진 노래를 작곡한 작가인데 말이다.

 특히 조명암은 북한에서 교육문화성 부수상, 평양가무단 단장을 역임하는 등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래서 1996년 전까지도 그의 이름은 거론하기 거북했고, 다른 사람의 이름이 작사가로 등재되었다가, 2005년경 남한에 남은 유일한 혈육인 딸이 저작자를 바로잡고 권리를 회복한다.

 부여에 도착한 우리는 백마강을 보러 부소산으로 향했다. 부소산성 입구를 지나 산성에 들어서니 천 년의 아픔을 딛고 있는 부소산이 차분하게 자리하고 있다. 8월 중순이어서인지 사람들은 없고 적막함까지 들었다. 숲 속 길을 따라 40여분을 들어갔을까, 자그마한 절과 누각을 지나 부소산 정상(?)에 오르니 백마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에게, 저게 백마강이야’ 할 정도로 강 폭이 좁았고 물은 전날 비가 와서인지 탁해 보였고 모래사장이 넓어 실망했다. 그곳 누각에서 가져간 간식을 먹으며 한 동안 게으름을 피우다가 낙화암으로 향했다.

 

 

안내판에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 의자왕 20년(서기 660년) 나당 연합군의 침공으로 백제여인들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적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후세 사람들은 이곳을 낙화암이라 부르며 백제 여성의 절개와 고귀한 충렬을 기리고 있다.”라고 쓰여 있다.

낙화암 암벽은 고작 60m의 높이다. 가 본 사람은 알겠지만, 절벽 바로 아래는 큰 바위로 되어 있어 뛰어내려도 강물이 아니다. ‘삼천 명의 궁녀가 빠졌다’고 하기에는 좀 의심이 갔지만, 역사 학자도 아니면서 공연한 시비를 걸 이유가 없었기에 백제의 아픈 역사를 잠시 되새기다가 고란사로 내려갔다. 고란사 약수터 고란정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목을 축였다.

그날 밤, 우리는 부소산성 입구에 있는 민박집에서 조 껍질로 만든 막걸리를 마시며, 백제 ‘계백장군’과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군대 이야기로 거품을 물었다. “소정방이 강 속에 살고 있는 용을 잡기 위해 미끼로 백말의 머리를 사용했다고 해서 백마강이 됐다는 전설이 있어…” “야, 백마강이 저렇게 얕은데 무슨 용이 있냐, 장어나 잡았겠지?” 밑도 끝도 없는 취기 오른 우리의 대화는 새벽녘이 돼서야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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