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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

 


 
며칠 전, 한 일간지 기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혹시 요즘 즐겨 듣는 노래 있으세요?”하며 묻길래, 속으로 “갑자기 뭔 뜬금없는 소리여?” 하다가 며칠 전에 쓴 칼럼도 있고 해서 “송가인의 트로트를 자주 듣는다.”고 했다. 


질문은 끊이지 않고, “송가인의 무슨 노래를 좋아하세요?”하며 묻는다. 이거, 아무리 봐도 신문에 낼 모양인데, … 잠시 생각을 하다가, 아침에 유튜브로 보았던 <단장의 미아리고개>라고 말했다. 전화를 끊으며 “그냥, 이미자 노래 좋아한다고 할 걸…”하며 후회 비슷한 걸 했는데, 솔직히 내가 좋아하는 노래는 <아씨>다. 언제부터 인가 혼자 흥얼거리곤 한다. 


 옛날에 이 길은 꽃가마 타고/ 말탄 님 따라서 시집 가던 길/ 여기던가 저기던가/ 복사꽃 곱게 피어 있던 길/ 한 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길/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 


<2절> 옛날에 이 길은 새 색시 적에/ 서방님 따라서 나들이 가던 길/ 어디선가 저만치서/ 뻐꾹새 구슬피 울어대던 길/ 한 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길/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


이렇듯 아름다운 가사를 쓴 사람은 임희재다. 그는 1919년에 금산군 남이면에서 태어났다. 일본 니혼대학(日本大學) 법학과를 다니다가 예술과로 옮겨 졸업하였다. 광복 직후 중등교 교사와 신문사 기자로 일하다,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희곡, 시나리오, 방송극, TV드라마 등 약 300여 편의 다작을 집필하였다. TV 드라마인 <아씨>의 주제곡을 작사했고, 극본도 직접 썼다. 집필 중에 건강이 안 좋아 이철향에게 대신 집필을 맡긴다.

 

 

 


 
<아씨>는 김희준, 김세윤, 여운계 등이 출연하였는데, 1970년 3월 2일부터 1971년 1월 9일까지 253회에 걸쳐 동양텔레비전(TBC)에서 방영하였다. 작품 시대 배경은 1930년대부터 1950년대에 이르는 30년의 세월을 다룬다. 


양반 댁에 시집온 아씨는 남편의 외도와 냉대 속에서도 인내와 순종하며 사는 것이 삶인 줄 알고 시부모를 봉양한다. 지아비를 섬기지만, 남편이 객지에서 죽고 시부모도 돌아가신 뒤 혼자서 쓸쓸히 여생을 보낸다는 내용이다.


 

 


이 드라마가 높은 시청률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주인공이 자기 희생으로 일관해온 전형적인 한국 여성상을 보여주었고 이를 동정하고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드라마에 출연한 연인원은 1,200명이었으며, 남편이 아씨를 냉대하는 장면이 계속 나올 때는 부인들과 여성단체 회원들이 방송국에 몰려와 항의하기도 했다. 이 드라마는 당시의 텔레비전 단일 프로그램 중 최고의 시청률을 보이며 일일 연속극의 붐을 일으킨다. 

 

 

 


 
당시에는 공식 시청률 조사가 없었지만 <아씨>가 방송되는 시간대에는 거리가 텅 빌 정도였다. 심지어 드라마가 시작되기 전에 ‘문단속을 잘해 도둑을 조심하고 수도꼭지가 꼭 잠겼는지 점검한 뒤 프로그램을 시청해달라’는 짤막한 멘트가 나올 정도였다.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이 있는데, 연지 곤지 찍고 족두리한 새색시 김희준(아씨)이 꽃가마를 타고 시집가는 모습이다. 당시에도 꽃가마를 타고 시집을 가는 전통 혼례식을 그때 처음 본 것인가 싶다. 기록에는 “꽃가마라는 것은 정식으로 혼인한 여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고, 정식 부인이 아닌 첩을 들일 때는 면교라는 꽃장식이 없는 가마를 사용했다.”고 한다.


옛 여인들에게 꽃가마 타고 시집가는 것은 꿈 같은 호강이었던 것 같다. 요즘 그 신성한 ‘꽃가마’를 정치인들이 자주 인용해 씁쓸하다. 선거철이 되니 국회의원들이 깡패처럼 세를 불리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꽃가마’를 보내느라 난리다. 정숙한 새색씨가 타야 할 꽃가마를 정치 의레기(의원+쓰레기)들이 함부로 사용하다니, …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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