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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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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규(장로,토론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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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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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4
복음과 사역과 기도(62)

 

 

(지난 호에 이어)
크리스천 교회는 순결하고 거룩하기에, 부패하고 추악한 사람들을 묵인하면 안 된다. 그들은 누룩이 없어야 하고 이질적인 혼합이 그들을 부패시키도록 하면 안 된다. 악의와 나쁜 교활은 마음을 더럽히는 누룩이다. 


크리스천들은 원한과 악의를 가지면 안 된다. <사랑>은 기독교의 진수(眞髓-ESSENCE)이고,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미”요 “장식”이다. 크리스천의 일생교제와, 신앙생활은 거룩하여야 한다. 


크리스천은 묵은 누룩을 제거하고 진실하고 참된 누룩 없는 잔치를 해야 한다.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 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고전5:13). 


악한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비행의 교인들이요, 끝까지 변화 받지 못하거나 변화되지 않는 교인들이다. 비행의 교인들은 벌을 받거나 당하여야 한다. 도려 내어야 할 것을 끊지 못하는 구렁텅이에 빠진 교인이다. <그를 너희의 교제에서 추방하라, 그리고 교제하지 말아라>. 


항상 선량한 사람은 신실하고 변함이 없어야 한다. 우리는 매사에 충분한 생각 없이 결정하면 안 되고 중대한 이유 없이 결정을 변경하면 안 된다. <크리스천들>은 때때로 타락한 이방인을 타락한 동료나 사악한 교인보다 더 존중해야 할 경우도 있다. 


충성스런 사역자들은 그들의 사역이 성공하든지 어떠하든지 주하나님에 의해서 용납된다. 사역자들은 그들의 충성에 의하여 인정받고 보상 받는다. 만일 내가 주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정직하게 행하지 않으면 나의 모든 신앙 활동이 주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한다. 


이 세상에서 훌륭한 사람은 그들의 명예와 존경을 균형 잡아줄, 불명예와 비난을 받을 것을 기대하여야 한다. 우리는 칭찬을 교만하지 않게 받으며, 비난을 성내지 않고 들을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 


<사역자>들은 “솔직하고 명료하게” <복음>을 전해야 하며, 모세와 같이 얼굴에 수건을 쓰고 <복음>을 흐리게 하면 안 된다. <복음>은 “율법”보다 더 명료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자(목회자)들은 가능한 한 진리와 은혜를 밝게 드러내어야 한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에게는 율법의 완성인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수건이 없어지고 모든 모형과 그림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누구나 주하나님께 돌아와 <구원>받게 되면 무지의 수건이 벗어지고, 마음의 어두움과 굳음이 제거되고 치료된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오늘날은 모든 크리스천들이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 복음의 빛과 은혜의 보물이 흙으로 만든 그릇(질그릇)안에 놓였다. 복음의 사역자들은 연약하며 깨어지기 쉬운 피조물이다. 다른 사람과 같이 약하고 정욕에 빠지기 쉽다. 죽어야 하고 쉽게 깨어진다. 


그러나, 그릇이 약할수록 주하나님의 능력은 더 강하며 보물 자체가 더 빛이 난다. 주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능력으로,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밝히고, 그들의 양심에 확신을 주며, 영혼들을 중생시키고, 마음을 즐겁게 하는 능력이 솟아나게 된다. 


죄에서 떠나며 악을 행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나 우리의 친구를 위하여 가장 원하는 일이다. 우리는 주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우리를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이 <은혜>를 위하여 종종 <기도>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악을 당하지 않도록, 보다 악을 행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목사와 교인들 사이에는 상호간의 애정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상호간의 유익이 되며 위로가 된다. 


선한 사람이 악하고 불경한 사람과 혼합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주님의 식탁과 악마의 식탁을 혼돈하거나, 하나님의 집과 이방인의 집을 혼돈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성전과 바알의 성전이 하나가 될 수 없다. 숯을 만지고 더럽지 않을 사람이 누구겠는가? 그러므로 죄로 물들인 자들과 교제하여 내 자신을 더럽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주하나님으로부터 용납을 받으며 거절되지 않기를 소망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들의 축복과 권위를 불신자들과 교제하여 더럽히는 것은 얼마나 배은망덕하는 일일까? 


오 어리석고 우둔한 사람이여! 사역자들은 불명예와 불쾌한 일을 행하지 않았다면 자기의 교인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아무리 시작이 좋을 지라도 인내가 없으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노력과 성실성이 동반될 때에 이것이 주하나님께 열납된다. 


주하나님의 섭리가 금하는 것은 그만 두는 것이 용납된다. 주하나님의 섭리는 어떤 사람에게는 많이, 어떤 사람에게는 적게 주어졌다. “넉넉한 사람은 부족한 사람에게 공급하여야 한다”. 빈부는 언제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부할 때에” <구제>하여야 한다.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서로 도와야 하며, 서로 의존한다는 것이 <인간의 상황>이다. 


우리는 구약성서에서의 선지자 <다니엘>과 같이, “요한”은 신약 성서 안에서 <주님>한테 “매우 사랑 받는 제자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종>이었으며, 복음서 기자요, 예언자요, 사도였다. 이렇게 그는 세 가지의 일을 수행했다. 이런 이유로 주 예수그리스도는 요한을 자기의 <종, 요한>이라고 부르셨다. 


그러므로 요한의 “계시”는 그 예언이 약간 “희미하게 예언 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복음>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보다 더 이에 대해 <탐구>하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이러한 계시의 사건들(요한 계시록)은 반드시 일어날 뿐만 아니라, 속히 일어날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것이 조만간 이루어질 것이다. 그 이유는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계시록22:20-21).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Holy, Holy, Holy, Lord God Almighty!)

 


거룩하신 주! 오! 그의 영광 크도다. 거룩하신 주! 오 전능하신 주!
이른 아침 우리 주를 찬양 합니다. 천지 만물 모두 주께 엎드려서 찬양하네 거룩한 주…..,
오! 주의 보혈 나의 모든 죄를 씻으사, 나 구원받고 주 하나님의 자녀 되었네,
놀라운 주의 사랑 한량 없도다. 나의 주 나의 구주 영원히 찬양해…..,
오! 예수님이 나의 맘에 들어오신 후 그 능력 있는 보혈의 힘 나를 붙들어
내 마음 방황할 때 잡아 주시는 나의 주 나의 구주 영원히 찬양해…..,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 천지만물 모-두 주님을 찬양 합니다. 거룩, 거룩, 거룩, 자비하신 주여, 성삼위 일체 우리 주로다, 거룩하신 주! 아멘.


주 하나님! 주의 행사를 우리에게 보이사, 우리로 개심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더 좋은 성질(성품)을 갖게 하소서!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우리의 자녀들에게 보이소서. 


우리의 모든 언행이 성결에 깃들어 있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있는 주 하나님의 은총과 우리의 성행이 비추는 빛이 우리의 얼굴에 빛이 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우리의 마음 속에 기쁨을 주시며, 우리의 얼굴에 광택이 넘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주 하나님 같이 주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있을 것이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작사: Reginald Heber -영국의 가장 위대한 찬송가 작가, 작곡: John B. Dyk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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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kyukim
김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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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07
2019-11-13
복음과 사역과 기도(61)

 

(지난 호에 이어)
징계하는 아버지만이 아버지다운 아버지라는 사실임을 알자. 현명하고 좋은 아버지치고 그가 비록 남의 자식의 잘못을 눈감아 버릴지라도 자기 자식들이 잘못할 때 묵인해 주는 아버지는 없다. 


아버지는 자녀에 대해 부자(父子)라는 인연 때문에 또한 자녀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다른 아이들의 잘못보다는 특히 자기 자녀들의 잘못에 대하여 더욱 민감한 법이다. 


그러니 하늘 아버지는 어떠할까! 죄를 지었는데도 책망 받음이 없이 사건이 무사히 무마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버림받았다는 슬픈 표시인 것이다. 그렇게 된 자는 아들이 아니라 <사생아>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주여, 주여”라고 울부짖는 “잎”들만으로는 안 된다. 시작이 잘되고 장래성이 보이는 “꽃”으로도 안 된다. <열매>가 있어야만 한다. 나의 생각, 말과 행동이 <복음>과 빛과 사랑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나무가 높고 길고 덩치가 큰 나무일수록, 그 나무의 수명이 길면 길수록 그 땅이 받는 해(Harm)는 더욱 클 것이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찍어 버림” 밖에 없음을 명심하자. 


믿지 않은 유대인들에게 내렸던 심판처럼, 포도원에 있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처럼 포도원 밖으로 뽑혀 버림을 누가 당할 것인가. 우리들, 참된 크리스천들은 육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형제 관계로서의 합당한 칭호를 부르자. 


부자는 가난한 자에게 “형제여”라고 부르고, 순결한 이는 회개자에게 “형제여”라고 부르자. 우리는 참회자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시기하거나” 눈살을 찌푸리는 것은 지극히 잘못된 일이다. 탕자가 회심하여 주하나님 품 안에 서는 구원 받은 형제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회심하기 전의 바울(사울)은 탕자였으며 “교회”를 “파괴”함으로 하나님의 <살림>을 삼켜 버렸었지만 회심한 이후에는,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은 양의 은총과 영예를 받았다. 


탕자(동생)를 질투한 큰 아들처럼 “질투하는 성도들”을 참을성 있게 대하시는 주하나님 아버지의 부드럽고 우아한 모습에서 주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밝게 빛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세리가 주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처럼 겸비와 굴욕적인 자세로 죄를 회개하는 정직한 마음과 하나님께 향한 간절한 마음으로 충만해 있었고, 진실성과 겸비심이 그대로 나타났고 그의 심령은 찢어지고 통회하며 순종하는 옷으로 입혀 있었다. 자기의 죄에 대하여 의분을 느끼고 <가슴을 쳤다>.


이에 반하여 바리새인은 자기의 금식과 십일조의 공로를 강조했다. 스스로 높은 체하는 교만한 사람은 주하나님의 대항자이므로 분명히 낮춰질 것이다. 스스로 낮추는 겸비한 사람은 하나님께 속해 있어서 높임을 받는다. 


주하나님의 영광은 교만을 배척하고, 겸비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주하나님은 모든 선한 것의 소유자이시다. 그러므로 주님은 기쁘신 뜻대로 그의 축복을 주실 수도 있고 거두실 수도 있다. 


우리는 늘 복음 안에서, 나의 심령 안에서 악한 눈의 본질인 시기(envy)를 제거하여야 한다. 눈은 종종 죄의 출입구가 된다. 다른 사람의 선에 대하여 불쾌감을 가지며 또한 그들이 해를 입기를 바라는 것은 바로 악한 눈이다.


악한 눈은 우리들에게 대한 곤고이며, 하나님께 대한 분노이며, 우리의 이웃에 대한 악의이다. 우리는 “큰 날”을 기다려야만 한다. “깨어”있어야 한다. 깨어 있다는 것은 우리 주님이 장차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가 오실 것을 소원하거나 종종 그의 오심에 대해 생각하는 것, 또한 언제나 그가 오시리라는 것이 확실하고 또 가까이 이르렀으며 그 시간은 불확실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기대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밤>이다. 또한 우리는 항상 <복음>을 깨닫고 깨어있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생각지 않은 때에 오시는 주님은 “언제” 올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정녕 내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주님을 기대하도록 해 주신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계22장 20-21).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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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kyukim
김진규
75939
17307
2019-11-05
복음과 사역과 기도(60)

 

 

(지난 호에 이어)
 내 자신이 받은 바 은혜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함을 드리는 것이 그 은혜를 확증하고 보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이다. 고의적인 살인은 언제나 죽음으로 벌 받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은혜롭게도 주 하나님은 <계약~복음>이라는 방법으로써 인간과 교제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계약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친절하신 은총을 크게 드러내 보이시고 인간의 의무와 <순종>을 합당하고도 유익한 <봉사>임을 알게 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용기를 주신다. 


주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준 계약을 살펴보면,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창9:13). 이것은 무지개를 보는 눈이 마음을 감동케 하여 그 <믿음>을 확고하게 한다는 뜻이다. 소망을 붙들고 있는 우리에게는 확실하고도 굳은 위로함이 있다는 것이 주 하나님께서 계약(율례)의 표(印-인)로 우리에게 구름 속에 <무지개>를 나타나게 하셨다.  


무지개는 구름이 비를 막 내리려 할 때 나타나며, 또 비가 다 온 후 구름이 걷힐 때 나타난다. 비가 온 땅을 뒤덮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을 때에, 주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약속의 표를 보여 주시어서 땅이 뒤덮이지 않게 하여 주신다. 


항상 하나님은 때에 맞는 용기를 주심으로써 우리들의 두려움을 물리쳐 주신다. 구름이 짙으면 짙을수록 <무지개>는 구름 속에서 더욱 밝아진다. 따라서 험난한 고통이 많이 있을지라도 용기를 북돋아 주는 위로함은 훨씬 더 큰 법이다. (고후1:6-자비와 위로의 주 하나님).


무지개는 하늘 한 쪽이 맑을 때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 뜻은 하나님께서는 진노한 가운데서도 긍휼을 기억하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구름이 마치 무지개로 둘러싸이는 것같이 되어 하늘 가득히 퍼지지 않게 하였다. 무지개는 채색된 비 이거나 혹은 금빛으로 물든 구름의 가장자리이기 때문이다.


즉 태양 광선의 반사이다. 이는 그 계약(복음)의 표가 지니고 있는 영광과 의미가 (의의 태양 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유래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으며, 그리스도 역시 <무지개>가 그 보좌에 들려 있는 것으로 묘사 되어있고(계4:3),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계10:1). 


이것은 주님의 권세뿐만 아니라 그가 <중보자>이심을 암시하는 것이다. 무지개는 그 속에 휘황찬란하고 불타는 듯한 빛깔이 있다. 이것은 비록 주 하나님이 세상을 다시는 물에 잠그지 아니하신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밀한 뜻이 끝나는 날에는 이 세상이 <불>로 소멸 되리라는 사실을 시사(암시)해 준다.


활(무지개의 모양)은 공포를 나타내는데, 이 활(무지개)은 핍박자들을 대적하기 위해 예비했던 <활>과 같이 (시편7:12,13) 활줄이나 화살은 없다. 활만으로는 아무런 효과도 올릴 수가 없다. 


무지개는 하나의 <활>이지만 위를 향하고 있는 활이며 이 땅을 향하고 있는 활은 아니다. 그것은 계약(복음)의 표인 이 활은 <위안>을 주기 위함이지 두려움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 하나님이 무지개를 보시고 계약을 기억 하시는 것과 같이 우리 크리스천들도 그같이 하여 믿음과 감사함으로써 그 계약(복음과 율례)을 언제나 마음에 간직하고 반추 하여야만 되고, 전도의 무기로 사용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의>를 행하지 않을 때 <죄>와 <고통>이 문 앞에 이른다는 것을 알자! 신앙인이 본분의 길을 떠날 때에 죄책과 슬픔이 뒤따르게 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탓이다. 


<계시록2:9>-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毁謗)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Satan)의 회당이라. 이는 물질 면에서는 가난하지만 영적으로는 부요한 자이며, 마음은 가난하나 <은혜>는 부요한 자이다. 


즉 그들의 영적인 부요는 그들의 외적인 빈곤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물질에 있어서 부요한 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는 가난하다. 때로는 외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이 내적으로는 부요하며, 믿음과 선한 행위에 있어서도 부요하며, 그 특권과 은혜의 선물, 소망 그리고 상속할 재산이 부요한 경우가 많다.


<영적인 부요>는 흔히 부지런히 수고한 보상으로 얻어진다. 부지런한 손이 부요를 이룩한다. 영적인 부요가 있는 곳에서는 외적인 빈곤을 잘 감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그리고 선한 양심 때문에, 물질상의 어려움을 겪게 되면 그들은 영적으로 부요한 자들이 되며 그러한 영적인 부요가 오히려 그들에게 더욱 만족스러운 것이며 또 오래 지속되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주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이미 버렸는데도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과 특별한 계약 관계를 맺고 있는 백성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잘못 자랑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탄의 회(무리)>가 된다. 


복음적인 예배의 순수성과 신령함을 모독하기 위해 세워진 회합, 그리고 주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인간의 날조된 관습과 의식을 조장 또는 선동하는 모임들은 <신성 모독>이 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어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편126: 5, 6>.

 
크리스천들은 고난의 상황에서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우리가 크게 고난을 당할 때 더욱 잘 행동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회개와 기도와 겸손을 행하여 고난의 때를 선용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한 슬픔의 눈물과, 고난받는 교회에 대한 동정의 눈물과, 기도와 말씀에서 생기는 <자비의 눈물>을 뿌려야 한다. 선한 사람은 이와 같이 눈물로써 씨를 뿌린다. 


욥과 요셉과 다윗과 많은 말씀의 선진들이 슬픔의 <씨> 다음에 오는 기쁨의 수확을 경험했다. 눈물의 골짜기 (이 세상)에서 성령으로 씨를 뿌리는 자들은 성령으로 영원한 생명을 거두게 될 것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마5: 4>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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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kyukim
김진규
75847
17307
2019-10-27
복음과 사역과 기도(59)

 

(지난 호에 이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유명하게 만드는 비결 중 가장 확실한 길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그것은 곧 선을 향하고 타인에게 유익을 끼치는 데 노력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크게 되고 가장 사랑을 받으려는 자는 겸손과 근면으로써 자신을 만인의 종으로 만들도록 하자. 


우리가 복을 구한다는 것과 우리가 극히 큰 즐거움을 구한다는 것과, 우리의 이익이 결부되어 자랑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 소유물의 넉넉한 데서 복을 구한다(시편49:18, 눅12:19). 


그러나 크리스천들은 자기들에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충분히 주실 수 있는 분으로서의 주 하나님을 향해 복을 구한다. 주님은 우리들의 영광스러운 면류관이시고 아름다운 보고이시며, 우리들의 힘이요, 분깃이다. 

 


땅에서 복된 자는 진리의 하나님 안에서 복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만이 참 하나님이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요5:20).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또 주님으로부터 은혜와 위안을 얻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피조물>이라 (고후5:17). 

 


주님으로 말미암아 신자된 자들은 지상에서의 삶이 아무리 짧다 하더라도 삶에 만족할 것이다. 불신자들은 인생이 아무리 길다 하더라도 만족을 얻지 못하고 불행할 것이다. 죄인의 장수는 그에게 신앙적 은총이나 축복의 증거가 되지 못하며 신앙적인 진노와 저주에 대한 어떤 피난처도 되지 않을 것이다. <내 백성의 수한은 생명 나무의 수한과 같다> (이사야65:21).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의 나무다. 여기에서 약속된 현세적 축복은 영적 위안물을 상징하는데, 모든 크리스천들은 주님 안에서 온갖 영적 위안을 향유하게 된다. 


주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하신 축복으로 신자들의 <기도>를 들으신다. 다윗은 <내가 자복하리라 하였더니 주께서 사하셨다> (시편32:5) 라고만 말했을 뿐이다. 탕자의 아버지는 그가 돌아올 때 그를 맞아 주었다.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그들이 아직 기도하고 있는 동안 확신과 징표를 주시는 주 하나님이시다. 


마찬가지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원한이 사라지자 모든 적대 관계가 종식되고 위대한 목자장이신 그리스도 아래서 그들은 한 우리의 양떼가 되었다 (요10:16). 


사역자(PASTOR)들은 악인에게 두려운 심판을 말할 때 이와 같이 <의인의 아픔을 근심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주 하나님의 말씀에는 위로가 비축되어 있어서 진정한 회개로 위로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위로의 곳간이 된다. 


주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어떤 자들은 듣지 않지만 또 어떤 자들은 귀를 기울인다. <심령이 말씀을 인하여 떨면, 귀는 말씀에 대해 열릴 것이다>. 보라! 오늘날 교회의 책망이 오용되고 교회의 방어를 위한 대표가 위장된 목회자(사역자)의 배신 때문에, 거꾸로 교회의 가장 친한 친구(정직한 크리스천)에게로 포화를 향하는 것은 전혀 뜻밖의 일이 아니다. 


특별히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들, 그들은 양심을 가장하여 주 하나님의 명예에 대해 열심히 있는 체하며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정열도 가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형식적 예배로 이 모든 일을 행했다. 


즉 온갖 종류의 악은 <주>의 이름에서 시작된다. 또 이것은 주 하나님을 무시하는 말로 해석될 수도 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을 위하여 주님과 함께 슬퍼하는 자들이다.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교회가 투쟁적 상황에서 괴로워할 때 온갖 근심 걱정으로 진심으로 동정한다.


또 그들은 교회를 위해 슬퍼한다. 교회의 온갖 비탄은 크리스천들의 슬픔이 된다. 그렇다면 합당하게 올려지는 <기도>는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은 것이다. 


우리는 그 앞에 우리들의 슬픔을 내 놓고 매우 겸손하고 허심탄회하게 우리의 소망을 주 하나님께 올려야 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의 뜻을 그의 뜻에 참을성 있게 복종시키면서 내 자신을 그의 처사에 완전히 맡겨야 한다. 이것이 우리 마음을 쏟아 놓는 것이다. 


우리 크리스천은 이 세상 재물을 의지하지 말자. 즉 속임과 강포함으로 위한 재물을 의지하지 말자! 왜냐하면 많은 것이 있는 곳에는 흔히 좋지 못한 방법으로 긁어내거나 저축함으로써 <불의의 재물-눅16:9>이 되는 것이다. 불의와 부정으로 탈취한 재물들은 허망하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바로 너희 자신이 속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재물을 당신의 주된 선으로, 그리고 최고의 목적으로 여기지 말라. 간단히 말해서 그 재물을 우상으로 만들지 말라.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결코 주님에게 감사드릴 소재가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소생시키지 않는다면, 옳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영혼에 생기를 넣으시는 분과 우리 <기도>에 활기를 불어 넣으시는 분은 곧 주 하나님 이시다. 이것은 <메시아> 곧 다윗의 아들이 교회의 보호자이며 구세주이시고, <포도원지기>라는 사실에 적용시키고 있다. 


크리스천들의 확고함과 견고함은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안에 쌓아둔 그 은혜와 힘에서 전적으로 기인하고 있다(시편68:28). 그 안에서 우리의 힘이 발견되며 그 힘에 의해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간절히 <기도>하고 간곡하게 <기도>를 계속하고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내면성의 정직은 얼마나 중요한가! 어떤 신앙이나 우정도 사실상 우리의 내면성에 성실성이 결여되어 있으면 그 가치가 없다.


참 <빛>으로 드러난 은혜는 정직하게 행하며 양심적으로 행동하는 자의 모습에서 볼 수 있다. 그런 자는 주 하나님과 사람에게 다 충실하다. 


이에 반해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자기의 욕망과 정욕을 따르며, 불공평하고 부정직하여 <신앙>과 모순되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런 자에게 주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모멸하는 자로 간주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귀는 모든 사람에게, 서로 서로에게 <신의>를 품으며 참된 <신앙인>이 되자!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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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kyukim
김진규
75786
17307
2019-10-17
복음과 사역과 기도(58)

 

(지난 호에 이어)
악인의 종말을 생각해 보자. 의로운 자의 고통은 평화롭게 끝나므로 그는 행복하나, 악인의 즐거움은 멸망으로 끝나므로 비참하다. 악인의 상태를 동경하는 자들은 실상 주 하나님의 아들들의 장막을 떠나가는 것이다. 


악인의 형통함은 짧고 불확실하다. 그들의 형통함은 견고한 바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나 그의 약속 위에 세워져 있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견고한 바닥 위에 있다는 느낌이나 만족감을 갖지 못한다. 


<악인은 결국 수치와 영원한 멸시를 당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주 하나님의 심판은 진리대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멸시하고 계시며 또 멸시하실 것을 경탄하거나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조만간 주님은 온 세상이 그의 마음과 같게 만드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 하나님께 열렬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자.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지켜왔다면, 우리의 의무를 철저히 지키고 우리의 순전함을 유지해 왔다면 우리는 우리의 보존에 대해 주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빚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도움을 얻었으므로 내가 여태까지 살아왔도다>. 이처럼 영적인 생명을, 영원한 생명의 증거를 주셨기에 우리는 지금 어떠한 재난을 당해도 불평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한 모든 성도들은 그의 교훈으로, 가장 훌륭한 조원자인 그의 성령과 그의 말씀의 교훈으로 인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처참한 시험 가운데 처해 있을지라도 내 자신의 판단과 교훈을 따라가지 말자. 그럴수록 주 하나님의 교훈과 <권유>를 받기로 결심하자. 하나님의 권유는 그것을 따르려는 결심을 가지고 교훈을 올바르게 구하는 자들에게 결코 부족됨이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주 하나님의 교훈으로 인도 받는 모든 사람들은 천국에서 그의 영광에 영접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가 뜻하는 목적으로 삼는다면 주님은 그와 함께 있는 우리의 영광을 우리가 영원히 행복하게 될 목적으로 만드실 것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시라 (시편73:26). 성도들은 주 하나님을 자기들의 분깃으로 선택한다. 또한 그들은 주님을 분깃으로 삼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통제하여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면서 살도록 하자.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하시는 것에서 생기며, 그것은 복을 만드는 행복한 만남이다. 


여기에, 주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복이라는 큰 진리가 제시되어 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그것은 내 의무이며 내 관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항상 의지하면서 살도록 하자!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고 음녀같이 주를 떠나 어떤 피조물을 결코 의지하지 않을 것이다. 악인이 온갖 형통함에도 불구하고 망하고 파멸할 것이라면, 우리는 주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자. 


우리가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할 수 있도록 주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자.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결코 그에게 감사드릴 소재가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자!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편90:12).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언제 떠날지 <자기의 날 수를 셀 줄> 즉 계수할 수 있어야 함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들이 지금 처하고 있는 고통스런 경륜을 잘 이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기도이다. 여호와여, 은혜를 베푸사, 우리가 세상에 사는 날이 얼마나 짧은가를 올바로 생각할 수 있게 하옵소서, 라는 자비를 구하는 기도가 된다. 


“자기의 날 수를 셀 줄” 안다는 것은 정말로 훌륭한 영감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의 단명과 불확실성, 그리고 거기에 항상 죽음과 영원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업무와 우리의 날수를 비교해 보아서, 이제는 소비할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배로 부지런히 업무를 수행해 나가야 한다. 계수를 하며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은 주 하나님의 교훈을 간구해야 하며, 주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하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임하셔서 바로 깨닫고 생각할 수 있도록 가르쳐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날 수를 세어 봄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참된 지혜로, 곧 진정한 경건의 훈련을 쌓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온 마음을 기울여야 하고, 또 그래야 할 가치가 있는 일이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이 세상에 유하며, 언제 이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 불확실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종종 생각해 보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종종 주 하나님의 자비를 기도 드리자. 감히 우리들의 어떤 공로를 내세우려 하지 않아야 된다. <오, 하나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는 것은 우리가 언제나 “아멘”해야 할 기도이다. 


우리는 하나님 은총 안에서 비로소 찾을 수 있는 그런 참된 만족과 행복을 위해서 기도하자. 주 하나님의 사랑만으로 만족을 누리는 은혜로운 자가 있다면, 그는 그런 만족을 누릴 것이요, 풍족히 누릴 것이며, 그것으로 만족하며 아무것도 부족할 것이 없을 것이다.


주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들 장래의 기쁨의 완전한 샘물이 될 것이다. 주 하나님을 자기들의 최고의 기쁨으로 삼는 자들은 그 기쁨이 충만케 될 것이다 (요일1:4). 하나님의 종들은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작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 하자! 나의 모든 언행이 성결에 깃들어 있게 하옵소서. 내 안에 있는 주 하나님의 은총과 나의 선행이 비추는 빛이 나의 얼굴에 빛이 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나의 마음속에 기쁨을 주시며, 나의 얼굴에 광택이 넘치게 하옵소서. 그리하면 우리 하나님 같이, 주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나에게 있을 것이옵니다. 주여, 우리 심령의 일을 견고케 하옵소서.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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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kyukim
김진규
75725
17307
2019-10-16
복음과 사역과 기도(57)

 

(지난 호에 이어)
선한 자의 멸망을 생각해 보자!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이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주 하나님)이시니라(시편4:8). 우리는 이 세상의 재물과 즐거움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기엔 부족한 것임을 알고 그것에 대해 경건한 경멸을 품도록 하자. 


주 하나님의 은총을 열심으로 구하고 그 은총 안에서 우리 자신을 기쁘게 위로하도록 하고 우리의 모든 세상 일들의 결과에 대해 경건한 무관심을 갖도록 하자.


그리고 거룩한 섭리의 인도와 보호에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일들을 맡기고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주 하나님의 사랑 안에 두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게 <되리라>는 사실에 만족하도록 하자! 


선한 자도 믿음과 기도로 그의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고서 밤낮 자고 쉰다. 그리고 매우 편안한 마음으로 그의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모든 것들을 행해 주시도록 맡기고 주님의 거룩한 뜻을 환영할 준비를 하고 있자! 즉 나는 등불처럼 내 의로움을 밝히시는 주 하나님께 내 길을 맡깁니다, 라는 뜻이기도 하다. 


세상을 살아갈 동안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우리를 부당하게 정죄할 때, <의롭게> 하시는 이는 주 하나님이심을 알자. 즉 주님은 믿는 자들이 지닌 의로움의 주 하나님 이시다. 


우리는 때때로 <인도와 보호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자.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시편5:1)>. 다윗의 이 기도는 말뿐만이 아닌 그의 깊은 묵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묵상이 <기도>를 위한 가장 훌륭한 준비인 것과 같이 <기도>는 묵상의 가장 훌륭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묵상과 기도는 병행되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기도를 이처럼 깊이 생각하여야만 된다. 


우리는 주 하나님께서 묵상과 간구의 기도를 생각해 주시고 우리 마음에서 온 것을 <주님>의 마음에 받아주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즉 격렬한 감정과 끈질긴 요구를 시사하는 표현이다. 


이처럼 실질적이고 강렬한 성도들의 <기도>는 매우 유용하며 놀라운 일들을 행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루의 첫 시간인 아침기도는 우리의 의무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가장 상쾌하고 활기 있으며 평온한 상태에 있을 때, 밤 동안 잠을 푹 자고 원기를 소생했을 때, 그리고 아직 그날의 일로 머리가 가득차 있지 않을 때가 <기도>드리기에 가장 합당한 시간이다. 


우리가 당할 낮은 위험과 유혹, 그리고 그것에 대한 자신을 고려해 볼 때, <믿음>과 <기도>로써 신선한 은혜를 공급받기 위해서는 그때에 <기도>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 
<내가 귀를 기울이사 나의 형편을 살피신 후, 주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대로 행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다윗>처럼 우리 자신을 그에게 의뢰할 수 있을 것이다. 


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느끼는 생을 사는 것이 참되고 순수한 <신앙>인 것이다. 우리는 믿음에 의해 우리자신을 주 하나님의 인도와 돌보심 아래 두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의 긍휼과 은혜 속에서 기뻐해야 한다. 


우리를 보호하시는 자는 하늘의 주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핍박하는 자는 땅의 인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합당한 때에 열심으로 그것을 변호해 주시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에게 임하시는 주 하나님의 역사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일 하심은 가장 훌륭한 전조(前兆)인 것이다. 주님은 우리들의 거룩한 소망을 불당김으로써, 우리의 가장 거룩한 <믿음>을 강화시킴으로써, 그리고 그 생각을 확고히 하고 감동을 일으킴으로써, <기도>를 위한 마음을 예비시킨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너그럽게 우리의 기도를 받아 주신다. 주 하나님은 원하고 갈구하는 마음을 위해 자비를 예비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기도와 간구>를 받기에 합당하고 그것을 잘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신다. 


그리고 나서 그 자비와 은총을 우리에게 주신다. 마음의 준비는 여호와께로부터 나며 우리는 그것을 위해 그에게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인도하시는 은총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잠언16:1). 우리는 때때로 간절한 기도와 간구에 앞서 수치심과 성스러운 부끄러움을 가지고 <죄>를 고백하여야 하며 부끄러움과 성스러운 찔림으로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별히 주 하나님이시여 우리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기도 해야만 된다. 즉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다. 우리가 오성(悟性)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성의 제어를 받을 수 있고 우리 자신을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영예이며 <행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기능을 활용하여 이성적으로 행동하도록 하자. 은혜가 새롭게 되는 것에는 <은혜>를 억제하는 재갈과 굴레가 필요치 않는 것이다.


<죄>는 회개되지 않을 경우 슬픔, 즉 영원한 슬픔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이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즐겁고 안락한 생활이란 곧 주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이라는 사실을 알자. 이것이야 말로 심령이 의로운 자, 그들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부여 받은 현세적인 <축복>이다. 


우리는 우리 혀에 재갈을 물릴 줄 알아야 하고 우리가 하는 말에 조심하여, 실언함으로써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하거나 우리 이웃을 손상시키는 일이 없어야 한다. 


즉 우리가 하는 모든 말에 있어서 정직하고 신실해야 하며 일구이언을 해서는 안된다. <만약 누구라도 말로 범죄치 아니하면 그와 같은 자는 온전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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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kyukim
김진규
75651
17307
2019-10-06
복음과 사역과 기도(56)

 

 

(지난 호에 이어)
<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의 왕위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 하니라 (잠20:28)>. 이 말씀에서 선한 왕 (최고 통치자)의 미덕은 “인자와 진리”이며 그는 자기의 약속을 충실하고 진지하게 지켜야 하며 어떤 위선도 배격해야 한다. 


또 자기에게 맡겨진 모든 책임을 엄숙히 이행해야 하며 진리를 옹호하고 장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거짓말과 위선과 불의에 눈을 감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고, 마찬가지로 통치책임자는 온화한 통치를 베풀어야 하며, 온갖 긍휼의 행위를 통해, 국민의 애호를 얻어야 한다.


<인자와 진리>는 주 하나님의 보좌의 영광이며, 그래서 왕들은 구약성경에서 <신들>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런 미덕은 그의 인품을 보호해 줄 뿐만 아니라 그의 통치를 옹위(escort)해 줄 것이다. 


통치자가 이 두 가지 중 하나라도 소유할 수만 있다면 퇴임 후 편안하고 안전하게 될 것이며, 자기 국민은 그를 사랑하고 그 대적들은 그를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크리스천의 세(3)가지 위대한 의무를 알고 지키고 살아가야 한다. <기도>에 의해 우리의 영혼으로, <금식>에 의해 우리의 신체로, <구제>에 의해 우리의 재산으로 드리는 것이다.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잠12:22> 에서 “거짓 입술과 진실한 입술”을 배울 수 있다. 즉 거짓말을 혐오하고 가능한 한 그것을 멀리하라는 뜻이다. 그 이유는 거짓말이 여호와께 미움을 받는 일일 뿐만 아니라 거짓말 자체가 주 하나님 법의 위반인 동시에 인류사회를 파괴하는 것이므로 스스로 거짓말을 허용하는 자도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말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행동에서 진실한 것을 본분으로 삼아야 한다. 이것은 그 모든 관계에서 성실히, 그리고 <진실히 행하는 자는 주님의 기뻐하심을 받으며> 그들을 주 하나님께서 즐거워하시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들은 신뢰할 수 있고 정직한 자들과 사귀기를 기뻐하며, 그런 자들의 이로움을 얻고 싶어한다. 따라서 주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서 은총과 총애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런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설교자와 말씀과 듣는 자들의 삼각관계를 의식하지 못하고 말씀전파에 임하는 사역자들이 혹 있다면 성공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바로 복음(Gospel)과 사역(Vocation)과 기도(Prayer) 를 통해서 만이, 주님을 전도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주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와 빛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공급해 줄 인물이 없다는 사실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오늘날 교회에 무엇 이겠는가? 


말씀의 사역자(PASTOR)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을 섬기며 봉사자로서의 공급해 주어야 할 필연적인 책임이 있다. 사역자란 자기 속에 빛과 계시와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있는 자이다 (Calling-召命). 


사역자가 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교회(공동체)를 섬기고 공급하는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그는 일어나서 복음에 기초해서 말할 때에 주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서 기꺼이 말씀하시게 된다. 


우리는 종종 주 하나님이시여 우리 모두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사 우리들로 하여금 참된 사역자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라고 간절히 기도 드려야 한다. 교회는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인간의 몸에 인간의 생각을 표현하듯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그리스도의 생각을 표현한다. 


도대체 사역(Vocation)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에게 영적 부(富)를 나눠주는 일이다. 우리 복음적인 교회는 지금 그리스도의 풍부한 재산과 기쁨을 갖고 있다. 즉 교회가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를 불신자들에게 소개하고 말씀을 듣는 자들이 모두 다 빛을 보고 하나님의 존전에 무릎을 꿇을 수 있도록 충만한 말씀을 가질 것을 주 하나님께 간구하자! 


내 자신이 말씀을 전하기 이전에, 내가 모르는 사이에 죄나 불결한 것에 접촉하면 이로 인해서 나의 영(Spirit)은 상처를 입으며 해방되지를 못한다. <사역자>들의 말씀은 분명하고 고상해야 하며, 주 하나님의 말씀의 특징을 알아 <복음>을 간결히 제시하여야 한다. 


성경말씀은 두 개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쉽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특성이요, 또 하나는 고상한 질을 가져야 한다는 특성이다. 주 하나님은 마음이 간악한 사람을 거절하시고 어린아이같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주 하나님의 능력은 3중적인 방법으로 우리 안에 나타난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로움이며, 그리스도가 우리의 거룩함이며,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속 함이다. 말씀에 영적인 이해가 없다면 설교자의 <기도>도 다 헛된 것이 된다. 즉 사역자가 타인에게 구원의 교리를 설교할지도 모르나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냉수를 끼얹은 듯 조용하다. 


사람들이 자신들을 지혜롭고 현명하다고 생각할 때마다 주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그런 사람들에게는 감추신다. 우리는 <성령>의 도움 없이 어떻게 기도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보지 못하는 것을 소망하고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기도하고 있어야 한다. 소망은 바램을 전제로 하며 주 하나님께 드리는 바램이 곧 <기도>다. 바로 우리가 <탄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역자들의 설교를 경청할 때 주 하나님이시여! 나에게 자비를 베푸사 정확한 말씀을 듣게 허락해 주시옵고, 나의 부족한 질그릇 안에 채워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자!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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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kyukim
김진규
75479
17307
2019-09-20
복음과 사역과 기도(54)

(지난 호에 이어)

주님을 믿고 선을 행하는 사람에겐 빵(식량)이 주어지는 것이다. 즉 정직하게 계약된 자기의 의무를 성실하고 정직하게 수행하고, 자기가 해를 입어도 결정된 바를 변경하지 않는 인격체의 성도들은 그들의 법칙은 대접 받은 대로가 아니라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겸손한 성도는 선하다고 말을 다시 듣는 것보다, 선을 행하는 데 더 큰 즐거움을 갖는다는 것을 기억하자! 신앙과 자선은 더할 수 없이 훌륭한 것이지만 우리 가족을 돌보기 위해 필수적인 것들마저 그러한 신앙과 자선을 위하여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자! 자기 친척, 특히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벌써 믿음을 버린 사람이요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나쁜> 사람이다(딤전5:8).  

하나님께서는 정직하고 겸손한 근면을 축복해 준다는 것을 알자! 남을 부당하고 불친절히 대우하는 자들은, 주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 선한 피해자들을 보상해 주실 것이며 하나님께 자기들의 사정을 정직하게 아뢰는 자들에게는, 보응하시는 하나님이 품삯을 지불하시는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자기가 할 일은 자기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떠한 직업 이든지, 근면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하는 일에 재능을 발휘하여 모든 합법적 기술과 비밀을 다하여 봉사하면 성공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사실 인간이란 자기의 직업이나 기능을 통해서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이 아닌가?

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는 비록 어떤 계약에서 작은 몫 밖에 갖지 못하고 출발을 했더라도, 겸손하고 정직하며 스스로 만족하고 근면하면 마침내는 커다란 풍요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주 하나님께서는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에게는 큰 일을 맡기시는 것이다. 타인의 몫이 될 것에 충성을 다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몫도 풍성히 받게 되리라. 정직하고 올바르게 주인을 섬겼던 종<야곱>은 마침내 부유한 주인이 된 것이다(창30:37-43).

비록 우리의 친척들이 자기들의 의무를 우리에게 다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우리의 형편을 친구들이 알도록 하고 그들의 형편을 물어 알아 두는 것이 우정과 형제애의 하나이다.

예의 바른 행동은 반목을 없애준다. 또한 우리는 우리에게 부당하게 성을 낸 사람들에게 겸손하고 유순한 태도로 말할 것을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 사정을 보다 호전시키기 위하여 화해를 간구하거나 화평의 권리를 간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자기를 멸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악의를 품고 있는 사람은 그 품은 마음이 오래간다. 그래서 자극이 주어지면 그것이 폭력의 기회를 찾는다. 즉 사람들은 노(怒)하기 잘하고 그에 대한 기억력이 좋다.

우리는 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자연적인 신앙의 깨달음과 <계시>된 신앙의 깨달음에 의하여 함께 인도되고 지도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남들을 압제할 수 있을만한 대단한 영적 능력의 힘을 가진 사역자들이라도, 자신을 억누를 만한 힘은 좀처럼 가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큰 영적인 힘은 때때로 사람들에게 그만큼 큰 함정이라는 것을 알아야겠다. 주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악의 근원을 감찰하고 계신다.

누구든지 <인간의 죄악이 관영>한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세상의 온갖 횡포와 압제, 온갖 향락과 방종이 그 인간 본성의 부패에서 흘러 나왔다. 즉 마음이 거짓되고 절망적일 만큼 사악해졌다.

세상 도의는 부패하였고, 습성과 성질도 악해졌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인색하여 돈만 바라는 것으로 보이거나, 탐욕과 독선적 기미를 보이는 일을 행할까 조심해야 한다.

천박한 노예 근성을 가진<영>들은 하나님이나 사람에게 귀여움을 받게 되고 위로함을 받게 되면, 오만하고 무례해지기 쉬우며 자기의 위치와 본분을 잊기 쉽다는 것을 주목하자(잠29:21).

명예를 올바로 지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성미 급한 자들이 흔히 자기가 죄책을 지고 비난 받아야 할 것으로, 다른 사람과 더불어 다투게 된다는 것은 하나의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교만과 노여움으로 말하는 것은 결코 현명하다고 말할 수 없다. 격정이 극에 이르게 되면, 이성을 잃게 되어 남의 말을 듣거나 자기의 말을 이야기 할 수도 없게 된다.

주 하나님께 소란스럽고 성급하게 호소하는 자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경솔하고도 대담한 악담이 흔히는 죄와 악한 마음을 품은 증거가 된다. <사래>에 대한 아브람의 사랑이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변함 없었음을 알 수 있다(창16:4-6).

화평과 사랑을 간직하고자 하는 자는 심한 비난에 대해서도 온순한 대답으로 응해야 함을 기억해 두자. <양보>한다는 것은 큰 노여움을 진정시킨다. 이것이 악을 치료하는 법 이기도 하다.

한 나라를 지배하는 최고 통치자의 악행은 곧 그 나라의 수치가 될 것이고 통치자가 악을 억압하고 덕의 옹호를 위해 권력을 사용하는 것이 통치자의 권세요, 도리임을 알자!

그런 자의 아래에는 결코 욕된 신하(조력자)가 발 붙일 수 없고 슬기로운 신하만이 큰 옹호자로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고 우리 자신을 주 하나님의<의>로 가리지 아니하고는 두려워서 주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직 이것만이 <증거>의 갑옷이 되며, 우리의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덮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주 예수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겸손하고도 담대하게 그분 앞에 나아가도록 하자!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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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kyukim
김진규
75387
17307
2019-09-16
복음과 사역과 기도(53)

 

 

(지난 호에 이어)
우리는 죄악을 처음 저지르려 할 때 그것을 경고하여 바로 잡기는 쉽다. 죄악은 터져 나오는 물줄기 같아서 우리는 죄악에 물들기 전에 그것을 떠나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두 아들과 남편을 잃은 나오미(룻기1:4)의 경우는 얼마나 쓸쓸하고 비통한 것인가! 


“아들을 잃고 남편을 잃은 두 가지 일이 한 순간에 온전히 그녀에게 닥쳤으니 어떻게 그녀가 위로 받으랴”(이사야 47:9). 이렇게 좌정하고 있는 자에게 위로를 보낼 수 있는 분은 주 하나님뿐이다. 만일 하나의 고통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그 속에서 자기의 죄와 임무를 깨닫지 못 하였다면 다른 고통이 오게된다. 


한 집안에 <죽음이 닥쳤을 때에는> 그들에게 어떠한 잘못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므로 그것을 바로 잡도록 하여야 한다. 주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게 하고는 우리의 죄가 생각나게> 하신다. (열왕기상17:18). 


하나님께서 가시덤불로 우리의 길을 방해하시는 것은, 우리를 그의 나라로 똑바로 돌아가라는 뜻이기도 하다. 죽음이나 그 밖의 어떤 일로 인하여 우리들의 친척과 헤어지게 되었을 때 함께 있는 동안 우리가 그들과의 인간관계에서 우리의 의무를 다하려고 애썼다는 사실을 그들이나 우리 스스로의 양심이 증언해 준다면, 그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그것은 이별의 고통을 덜어 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그들과 함께 있을 동안 우리는 그들에게 성실히 대함으로써 헤어지더라도 친척들에 대한 우리의 과실로 인해서 가슴 아프게 후회하지 않아야 된다. 친구들이 헤어질 때에 서로 <기도>해 주면서 헤어진다는 것은 퍽 아름다운 일이다. 


인자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자는 자기자신의 고통보다 남이 당하는 슬픔이나 자기로 인해서 남이 당하는 고통을 매우 가슴 아프게 여긴다. 우리는 때때로 작은 일들의 도움으로 중요한 일이 빨리 이루어지기도 함을 알자.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정당하고 정직해야 할 뿐 아니라, 정중하고 명예로워야 하며, 남에게 들킬 것을 꺼려하는 행동을 하지 말고 솔직히 정직하게 행해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정직이야말로 최선의 정책이 될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그들의 재산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신앙을 기꺼이 버리며 도저히 신앙에 붙어 있을 수 없게 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송하지만 <성결>한 생활을 하려 하지 않는다. 


<믿음>은 이 세상의 욕심과 함께할 수 없음으로 주하나님을 따르려는 자는 세상의 욕망을 버려야 한다. 또한 우리가 바라는 모든 선을 모든 선의 근원이 되신 <주님>께 구해야 마땅한 법이다. 


말씀과 기도로 봉사하는 사역자들은 남에게 권면을 주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듯이 또한 이러한 인간관계에 몰입하는 자들을 위해서 행복을 기도해 주기에도 가장 적합한 인물이다. <지도자>는 그 시대에 쓸모 있고 기여할 수 있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 


참된 참회에는,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있기를 바래서 요행(우상)으로 섬기고, 하나님과 대적하는 보좌를 우리의 마음 속에다 제공해 준 그런 모든 것들의 전적인 무익함을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탐닉(耽溺)하고 있는 감각적 쾌락이 우리의 만족이 될 수 없음과, 우리가 탐닉(耽溺)하고 있는 이 세상의 부귀도 우리의 기업이 될 수 없으며, 하나님 밖에서는 행복하거나 평안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주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하는 희망을 가지고 그의 정의에 굴복해야 한다. 죄에 대한 회개뿐만이 아니라, 죄에서 벗어 나고자 하는 진실된 참회를 하여야 된다.


주 하나님은 계약의 말씀에서 그 자신이 그의 백성들의 아버지가 되심을 즐겨 밝히셨듯이, 주 하나님께서는 자식을 대하는 아버지처럼 그의 자비로움을 주님의 백성들에게 기꺼이 보여주신다. 


주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 이시듯이, 또한 자비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자식들의 불순종과 탄원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매우 근심 하셨다(시편95:10). 


남북한 해방 분단 71년이 지난 삼천리 금수강산의 통일을 염원하기 위한 온 교회의 사역자와 성도들, 위정자들의 통곡의 기도와, 남북한 위정자들의 부정부패와 탐욕과 정적(의견이 다른)을 척결, 말살하는 가증한 일에 어찌 주 하나님께서 진노 하시지 않겠는가! 


주 하나님께서는 그가 생명(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한 국민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심정을 주실 것이다. 정직하고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 동족의 고통이 주 하나님께 <슬픈>일이 될 때, 우리 조국의 백성을 <구원>해 주실 줄 믿는다. 


잘못 된 자식에게 너그러움을 베푸는 어지신 부모들과도 같이 <주 하나님>은 우리의 <벌>을 기꺼이 거두어 주신다. 자비하신 주 하나님은 인간들이 죄를 지어 사망(망국)에 이르는 것을 결코 즐겁게 여기지 아니하심을 알자! 


이스라엘을 구원한 자들은 특별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었다. 이 선택된 자들에게 주 하나님의 성령을 보내주시어 이스라엘을 구원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선택할 때, 주 하나님께서 행하시듯이 백성(국민)의 신뢰와 권한으로 치우침 없이 뽑아야(선출) 하며 그렇게 할 때 주 하나님은 이 선택된 자를 너그럽게 인정해 주실 것이다.


바로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분이 될 것이다. 이제 주 하나님께서는 해방 75년, 2020년에 남북 통일을 안겨 주실 것이다. 믿고 간절히 기도하자! <예레미아 29:12-13절>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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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kyukim
김진규
75289
17307
2019-09-04
복음과 사역과 기도(52)

 

 

(지난 호에 이어)
우리 성도들은 인생의 무상함과 연약함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자! 그러므로 인간 생명의 근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주하나님은 진실로 생명의 큰 근원이시다. 왜냐하면 그가 “생기를 인간의 코에 불어 넣으셨고”, 그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호흡을 시작하고 그때부터 생명의 덧없음과 더러움에 부딪쳐야 한다.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다”(욥기14:1). 이것은 생명의 덧없음을 뜻한다. 이것은 <하와>라고 불리는 첫 번째 여인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녀는 모든 살아있는 자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유혹에 속아서 최초로 범죄한 이 여인에게서 우리모두가 태어났다. 따라서 우리의 날들을 짧게 하고, 슬프게 하는 죄와 타락이 그녀로부터 유래되었다. 여자는 약한 그릇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가 어머니를 닮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욥기25:4)”. 깨끗한 시냇물이 더러운 물 줄기에서 나오거나 가시나무에서 포도가 나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결한 자손이 부정한 부모에게서 나올 수 없다. 


우리의 습관적인 타락은 우리 부모로부터 받은 우리의 성품에서 유래된 것이므로, 그것은 우리의 뼈 속에서 자라고 있다. 우리의 피는 합법적인 범죄로써 획득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전병으로 더럽혀져 있다. 우리를 위해 죄인이 되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갈4:4)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또한 인간 생명의 본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꽃이며 그림자이다” (욥기14:2). 꽃은 시든다. 그것의 모든 아름다움은 곧 시들어 사라져 버린다. 그림자는 빨리 지나간다. 그리고 그 존재는 곧 사라지고 밤의 장막 속에 묻혀버릴 것이다. 


그 어느 것도 우리는 헤아릴 수 없으며, 그 어느 것도 신뢰할 수 없다. 우리 인간 생명의 짧음과 불확실함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사람은 <사는 날이 적다>. 여기에서 생명은 달이나 년 수로 측정되지 않고, 날 수로 측정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느 날에 우리의 마지막이 올지 확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날 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적으며, 처음 조상들의 날수와 비교해 볼 때, 매우 적다. 그것을 영원과 비교할 때는 더욱 적다. 그런고로 사람은 때로 나오자마자 “쇠하여지고”, 모태에서 나오자마자 요람에서 죽으며 이 세상에 와서 그 일을 하자마자 즉, 그의 손에 쟁기를 잡게 되자마자 곧 사라지기도 한다.


우리는 인간의 불행한 상태에 대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사람은 짧은 생을 누릴 뿐 아니라, 슬픈 생도 누린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지내는 날 수가 얼마 안 된다 할지라도, 그 적은 날 수를 즐겁게 지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도 않다. 이 짧은 날들 동안에 “괴로움이 가득하다”. 즉, 수고하거나 투덜거리면서, 슬퍼하거나 두려워하면서 괴로워할 뿐만 아니라, 괴로움이 가득하다. 분노나 초조, 그리고 당황스러움 등을 맛보지 않고 지내는 날은 하루도 없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러한 것을 많이 느낄 것이다.


사람은 “동요가 가득하다”. 그의 날이 적다는 사실은 그것이 끝나게 되리라는 예상 속에서 그에게 번민과 불안을 가져다 주며, 그는 항상 그의 생명에 대한 의혹에 매달려 있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날 수가 이처럼 괴로움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에 그 날 수가 적다는 것, 영혼이 육체 속에 갇혀 주님으로부터 추방당하는 기간이 영원하지도 또한 길지도 않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 우리의 날 수는 많을 것이며, 괴로움에서 완전히 떠나고 또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현세의 슬픔을 보상해 줄 것이다. 인간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인생의 죄악성에 대해 생각해 볼 때 행동적인 범죄는 천성적인 타락의 자연적 소산물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원죄>라 불린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모든 죄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또한 죄의 삯으로 사망에 이르는 인간생명의 한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날을 정하셨고 그 달 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 제한을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욥기14:5) 즉, 우리의 생명은 끝날 것이다.” 땅 위에서의 우리의 날 수는 무수한 것이거나, 끝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효를 셀 수 있는 날들로서 곧 끝날 것이다.


우리가 얼마 동안 살고 언제 죽을 것인가는 주하나님의 뜻과 섭리 속에 결정되어 있다. 우리 달의 수효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으로써, 결코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그의 권능의 뜻과, 결코 속일 수 없는 그의 전지전능하신 시야 아래 놓여 있다. 주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 생명의 종결을 명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의 수명은 그의 손 안에 있다. 


자연의 권능은 주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으며, 그 아래에서 움직인다. 그 속에서 우리는 살고 행동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처벌하시고 선을 상 주는 일을 정하신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한계를 우리는 뛰어 넘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뜻은 변경될 수 없고, 그의 선견지명은 오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처럼 우리의 체질을 알고 계시며, 그것을 참작하시고, 그러한 체질로 인한 우리의 본성을 참작하실 주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우리 자신을 맡김으로써, 큰 고통 아래서도 어떤 위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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