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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후 방문한 내 고향

 

2009년 캐나다스코필드박사기념장학회(Dr. Schofield Memorial Scholarship Association of Korean-Canadians) 회장을 맞고, 스코필드 박사의 모교인 구엘프대학교 수의과대학 스코필드 세미나룸(Schofield-Korean Memorial Seminar Room)에 비치될 흉상 제작을 위해 모국을 방문하였다.


 1964년 10월 4일 고국을 떠난 후 이것이 3번째 모국방문과 첫 번째 고향땅을 찾게 되는 기회였다. 어느덧 70대가 되었지만 고교 졸업 후 50여 년간 헤어졌던 고향친구들이 그리웠고 보고 싶었다. 


 고향을 떠날 때 겨우 3만명 인구의 작은 도시가 이제 10배가 넘는 30만명의 큰 도시로 변했다. 그리고 특별한 것은 반기문 UN사무총장의 세계적인 명성 덕분으로 모교는 물론 고향도 모두 자랑스러워 했다.


 가까스로 찾은 옛 동네에서 나를 기다렸던 특별한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70대 노인으로 변했으나 옛 모습이 조금 남아 있었기에 단번에 이름을 부르며 손을 잡고 포옹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엔지니어의 꿈을 가졌던 그는 H공대를 졸업한 건축기사로 평생을 고향에서 일하며 살았던 유일한 친구다.


 그리고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1964년 10월 4일 제2차 서독 루르탄광으로 떠날 때 김포공항에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던 친구다. “우리나라가 너무나 가난하여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이 없어서 너처럼 서독 루르탄광 광부로 떠나는 젊은 청년들을 보면서 무척 가슴 아프고 슬프다. 언제쯤 대한민국도 잘 살 수 있을까?” 


 산업의 기적이 일어나 20년, 30년 그리고 50년 후에, 대한민국이 잘 사는 국가가 된다면 다시 고향땅으로 돌아와서 함께 살자고 했으나 나는 무거운 침묵으로 응답했다. 


 불확실한 나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고향땅에서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는지? 


 또는 서독 루르탄광 1000미터 막장에서 석탄에 묻혀 죽어서 고향땅으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내 운명을 놓고 한없이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던 친구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당시 1인당 국민소득 76달러에서 50년 후 3만 달러에 가까운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발전했다. 


 50년 동안 이방인으로 살았던 나는 이제 한국인-캐네디언(Korean-Canadian)으로 고향땅에서 다시 옛 친구들을 만나는 기쁨의 감격을 가졌다. 그리고 머지않아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대한민국이 번영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고향친구들이 무척 대견하고 자랑스럽게만 보였다. 


 또한 “만약 고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 루르탄광에서 흘린 눈물과 불타는 애국심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아직도 가난 때문에 고통의 눈물을 흘려야 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들의 목소리가 유난히 청명하게 나에게 들려왔다.


 그날 저녁 300명이 넘었던 동창 중에 나의 고향방문 소식을 듣고 찾아온 친구들은 겨우 20여명 뿐이었다. 이미 질병으로, 각종 사고로, 세상을 떠난 친구들이 많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며 슬픈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생명을 걸고 서독 루르탄광으로 떠났던 나는 50년 후 고향땅을 다시 찾아왔는데... 그처럼 그리워했던 일부 고향친구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내가 독일 땅에 도착하자마자 선물로 보낸 "베토벤 심포니5 운명"을 받고 매우 기뻐했다던 L친구도 이미 고향에서 볼 수 없는 친구가 되었다. 모든 것을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이며 캐나다로 돌아왔다.

 

2015-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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