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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봉 칼럼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http://skang3441.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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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의 역사 500년(26)-?6.25 남침 발발(3)

 

 

 

 

 (다음 호에 계속)


(2) 한편 한국정부는 전쟁이 발발하자 주미한국대사 장면과 서기관 한표욱에게 긴급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부에 사태의 긴급을 알렸고, 6월 26일 장면대사는 백악관으로 트루먼 대통령을 방문, 미군의 한국파병을 요청하였다. 미국은 즉시 UN의 안전보장이사회를 열어 한국문제를 건의 하였다.


(3) 6월 26일 4시에 UN의 안전보장이사회가 소집되었고, 미국의 제안을 받아 들여 “북한군의 즉각적인 전투중지와 38선 이북으로 철수”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9:0으로 가결하였다(이 표결에서 유고슬라비아는 기권). 미국과 UN은 이를 북한에 통고하였으나 북한은 이에 응하지 아니하였다.


(4) 6월 27일 안보리는 다시 회원국들에게 “북한의 군사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남한에 제공할 것”을 7:1(기권 2)로 결의 하였다. 그리고 트루먼 대통령은 더글라스 맥아더에게 “남한에 대한 해, 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문제가 발생하였다. 소련의 말리크 대표가 회의에 결석을 한 것이다. 안보리에서 미-영-불-소-중 상임이사국은 어느 누구든 한 나라만 반대를 하여도 모든 법안은 부결되게 되어 있는데, 소련이 마땅히 부결을 할 한국 파병안이, 그의 결석으로 인하여 일사천리로 통과한 것이다.


당시의 중국은 모택동 정부가 아니라 장개석 정부로 우리 편이었던 것이다. 설에 의하면 말리크가 복통이 나서 결석을 하였다고도 하나, 여하튼 그의 결석은 우리 한반도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다. 이를 보고 우리는 천우신조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만일 그가 출석을 하였다면 한국전쟁은 완전히 적화통일이 되었을 것이고 남한은 없어졌을 것이다. 지금까지 UN이 전투병력을 결의하여 파병케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고 마지막이다. 설마의 역사는 이렇게 천우신조에 의하여 아슬아슬하게 또 한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5) 6월 29일, 맥아더는 하네다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수원으로 와서 한강방어선지역을 시찰하고 워싱턴에 지상군 투입을 요청하였다. 이렇게 해서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의 회원국이 UN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6) 7월 1일, 영국과 프랑스는 “UN군사령부의 설치와 UN회원국들의 무력원조를 미국정부의 단일 지휘아래에 둔다”라는 공동결의안을 안보리에 제출하였다. 이 공동결의안은 7:1(기권 3)로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16개국이 전투병력을 파견하게 되었다: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벨기에, 콜롬비아, 그리스, 필리핀, 에티오피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뉴질랜드, 타이, 터키, 남아프리카연방.


 이러한 긴급파병문제에는 많은 에피소드가 있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군의 전설로 불리는 명장 <몽클라르> 장군이 한국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스스로 자신의 중장 계급장을 떼고 중령으로 강등하여 대대장의 직함으로 프랑스군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터키의 영웅인 <타흐신 야즈즈> 장군 역시 2개 여단 병력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콜롬비아에서는 정규군이 아닌 게릴라용병부대, 에티오피아에서는 황제의 특명에 의하여 정규군과 황제의 친위대 병력까지 합세를 했고, 뉴질랜드의 마오리족도 참전을 하였다. 


이들 중 어느 군대는 총을 미처 준비하지 못하여 창과 화살을 가지고 오는 에피소드도 있었지만 드디어 미군에게서 총을 지급받아 전투에 임하기도 하였다.


(7) 7월 10일, 미국대사 장면은 38선은 의미를 상실했으며 전 한국의 해방과 통일은 필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승만은 미국 CBS와의 인터뷰에서 “북한군의 행동은 38선을 제거시켜 주었고, 38선에 의한 분단이 지속되는 한 한반도에서 평화와 질서는 결코 유지될 수 없다.” 그리고 “침략자를 격퇴하는데 있어 한국군은 결코 38선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확고한 북진통일론을 선포한 것이다. 이승만의 이 선언은 미국을 크게 놀라게 하여 애치슨 국무장관으로 하여금 주한 미국대사 죤 무초에게 긴급 지시를 내리게 하였다. 미국은 38선을 넘어서는 북진하지 않을 것이며 그곳에서 계속 방어를 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애치슨과 무초 대사도 이승만의 고집을 꺾지 못하였다.


 (8) 8월 1일, 안보리의 8월 의장국이었던 소련대표 <말리크>는 6.25전쟁이 남한의 선제공격으로 발발했다고 주장하면서 그 동안의 안보리 결의안들이 다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한국전쟁은 미국이 한국을 조종한 북침이라는 것이었다. 


소련은 이 전쟁에 전혀 참여한 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총 한 자루도 도와 준 것이 없다. 이 전쟁은 한국인끼리의 전쟁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역선전을 예상한 장면은 미국측 대표 오스틴과 짜고 한국전선에서 노획한 소련제 소총 한 자루를 가지고 와서 각국 대표들 앞에서 제시를 하였다. 소련제라는 철인이 찍힌 그 총으로 인하여 “소련의 불개입, 남한의 북침”이라는 주장은 거짓이라고 논파를 당하였다. 


(9) 8월 3일, 조선 인민군은 대구와 부산 가까이 쳐내려 왔다. 국토의 9/10를 점령하였다. 곧 각국에서 UN군이 도착할 것이라는 정보를 받으며 미군과 국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강렬한 저항을 함으로써 전투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 때에 대한민국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은 다부동 전투에서 인민군의 침공을 처음으로 격퇴하고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며 UN군의 도착까지 시간을 버는 작전에 성공하였다.


(10) 9월 1일, 영국이 안보리의 의장국이 되었다. 옵서버로 참석한 장면 대사는 영국 대사 글랜드윈의 허락을 받아 참석하였다. 의장으로부터 발언권을 얻은 장면은 포효를 하였다. 


“그 동안 갖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나는 할 말을 못하고 참아왔다.” 첫마디부터 소련을 공격하니 소련 대표 말리크는 규칙발언 이라면서 “도대체 저 자가 누구인데 무슨 자격으로 저 자리에 감히 앉아서 발언을 하는 것이냐? 저 자는 이승만 도당의 괴뢰”라고 마구 욕설을 퍼부으며 미국이 조종하는 남한의 북침설, 한국민들끼리의 전쟁을 떠들어 댔지만, 다른 대표들의 생각을 바꿀 수는 없었다. 


장 대사는 말리크에게 욕설을 취소하라고 항변하였다. UN에서 이러한 욕설과 항변이 있었지만 모든 결과는 그렇게 우리 뜻대로 착착 진행이 되어가고 있었다. 감사한 일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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