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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靈魂) 그리고 꽃

 

영혼은 존재하는가? 그리고 꽃은 왜 아름다운가?


영혼 때문만으로도 세상에 종교가 존재하는 것이라 여겨지고, 꽃이 예쁘게 핀다는 이유만으로도 지구촌 만물이 어울려 살아진다 보여진다.


나처럼 죽으면 흙이 된다는 이에겐 그래서 종교 그 자체가 성립되지가 않을는지 모르나 그러함에도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다르게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연속적 변화의 과정만으로도 나는 삶이라는 고마움에 충분히 취하며 산다.


벌과 나비가 우리인간들도 예쁘다는 꽃을 찾아 날아다니는 바람둥이 기질 버릇이 그래서 예삿일로 보여지지 않는다.


꽃처럼 싱그러운 나이, 이 팔(2 8)청춘 짝짓기 시기의 발랄한(예쁜) 생기(生氣)는 우주 만상이 살아있음의 표상(表象)이고 생의 연속성의 주체이다. 그래서 우주만상의 표상은 낳고 죽음이라는 모든 과정 자체가 순리이고 연속성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나무가 죽으면 흙이 되듯, 15년 내가 키우던 통키(개)도 죽어 흙이 되고, 나(인간)도 죽으면 흙이 된다는 이치가 왜 틀리는가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영혼이라는 실체가 논리를 벗어난 실존적 문제로 내(사람) 머리에서 맴돌게 된다. 산 사람 그 누구도 영혼을 만나보지를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은(특히 종교 쪽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리고 꽃은, 어떤 꽃이든 예쁘게 핀다. 자연의 이치는 무엇에나, 어디에나 이유가 있다. 꽃이 예쁘면 예쁜 이유도 분명 있을 터이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듯, 어디에나 무엇에나 까닭, 이유가 궁금하여 생각을 이어보게 된다.


육체가 아니면서 육체에 깃들어 인간의 활동을 지배하다 죽어서도 육체를 떠나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영혼이라는 실체가 종교의 주체로 대우받고 있다.


그렇다. 영혼이 없다면 종교 그 자체가 무용이 되기 때문으로도 그러하다. 그런데 문제는 영혼의 개수(個數)에 있다. 기독교에선 영혼이 사람에게만 적용되지만 불교에선 뭇 생명체(동물) 모두로 확대되어 어떤 살상도 죄라 여겨 고기를 못(안) 먹는다.


그래서 기독교에선 태초에 아담과 이브로 시작된, 수억만 명으로 늘어난 영혼들이 최후의 심판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 영혼의 문제에서 좀 빗겨 꽃의 아름다움(예쁨)에 초점을 맞춰 생각을 이어보자.


꽃은 어떤 꽃이든 왜 아름답게 필까? 그리고 나비와 벌은 왜 꽃을 찾아 날아들까? 내가(인간) 봐도 꽃은 예쁘니 벌과 나비는 예술가임이 분명하다. 물론 그 이유는 종자 번식을 위한 자연의 수단이지만 내 관심은 벌과 나비가 나(인간)처럼 아름다움이라는 유혹에 약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바로 영혼과 관계 있어 보인다. 개인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고 아름다움이라는 유혹에 의해 생명체의 연속성이 유지되고 있다는 이 묘한 관계성, 이것이 생명체의 영원성으로 보인다.


해서 내 눈엔 아름다움이 곧 연속성의 실체, 곧 영혼이다. 이는 개수(個數)라는 개념을 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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