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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가장 용기있는 결정, Oh! 캐나다

 

 


    

(지난 호에 이어)
그러나 아직 채용절차가 모두 끝난 것이 아니고 다음 주, 1주일간 실기 TEST가 있다고 전했다. 특히 딸애는 “아빠, 꼭 합격해야 돼요” 하며 몇 번을 당부했다. 이런 바램과 염원을 안고, 그 다음주엔 기차로 런던에 도착했다. 


호텔에서 시행된 일주간의 훈련에는 노바스코샤에서 온 여성 참가자도 있어 신기했다. 처음 12명이 참가해 90% 이상 받아야 하는 필기 시험에서 5명이 탈락했고, 또 격투기 시험에서 2명의 추가 탈락자가 생겼다. 


마지막에 권총 사격이 있었는데 결국 탈이 났다. 25미터 부문에서 타겟을 벗어나고 만 것이다. 과녁이 잘 안보여서 애를 먹었는데 한번 더 기회를 줬지만 실패였다. 시력이 그렇게 약해진 줄 미처 몰라 안경을 준비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고 무엇보다 꼭 합격하라던 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감독관도 몹시 아쉬웠던 모양이었다. 태권도를 오랫동안 수련해서 한국을 좀 아는 감독관은 내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수업에 임했고 실기에서도 열심히 했다고 인식했는지, 특별 추천을 해주겠다고 했다.


즉 무장 경호 대신 현금 준비와 입금 프로세싱을 하는 내근 직을 추천했다. 본사에는 이미 승낙을 받았다고 했다. 이런 경우를 천우신조라 해야 할지, 너무도 고마운 인연이었다. 도와 달라고 아쉬운 소리 한 것도 아닌데, 다만 꼭 붙고 말겠다는 바램과 열성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한 것은 사실이었다.


특히 딸애의 강렬한 염원에 답하려 밤잠을 줄이면서 최선을 다해 참가한 교육이었다. 그래서인지 감독관이 먼저 도움을 준 셈이었다. 그리하여 딸애의 간절한 소망을 이룰 수 있었고,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자 그 다음주부터 내근 직 풀타임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종 시험을 통과했고 오타와에서 함께 참가했던 군인 출신, 마크의 경우는 달랐다. 한달 넘게 기다려도 풀타임 자리가 나지 않아, 내근 직으로 일을 보충하기도 했는데, 결국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말았다. 적은 수입으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인생사 새옹지마란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되었는데, 우리는 늘 최선을 다할 때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마주하게 됨을 알 수 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이민 초기 시절의 생일날, 캐나다 취업과 관련된 일화이다. 참 우여곡절이 많았구나 싶었다.

 

5. 최종 통과한 캐나다 장교 시험,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웬 생뚱맞은 얘기인가 할 것이다. 아니 이민자가, 그것도 40대를 넘긴 나이에 웬, 캐나다 장교시험이냐 라며 놀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연을 밝히면. 우연한 기회에 같은 빌딩에 있었던 모병센타 모병관의 추천이 있었으며 또 아들의 사관학교 입교 절차에 관한 정보를 취합하는 과정에서, 당시 캐나다 정부의 아프가니스탄 파병 결정에 따라 많은 군 인적자원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모병관의 농담 섞인 한마디 “You can apply for the position as well”가 내겐 진심으로 다가왔고, 그 당시 “내가 캐나다에 이민 와서 무엇을 두려워하랴”라는 강한 정신력과 믿음이 있었기에 과감히 지원서를 제출했던 것이다. 그것도 일반 군인이 아닌 대졸 학력을 요구하는 장교 시험에 지원하여 합격한 것이다.


최종 합격이란 소식을 듣는 데는 십 년 이력조회로 인해 한국을 거쳐 오느라 무려 8년이란 긴 세월이 흐른 뒤여서 거의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모병관으로부터 전해 온 합격 통보였던 것이다. 


8년 전 처음 지원서를 제출하고 나서 적성검사, 신체 및 체력 검정 그리고 인터뷰 과정을 마친 후 10년 배경 조사를 한다는 것이었는데, 캐나다 생활 4년 만에 즉, 시민권을 취득하자마자 시도한 도전이었는데 문제는 배경 조사 기간이 캐나다 생활에 비해 한국에서 장시간이 소요된 것이었다. 


정확히는 43세에 응시하여 51세 즉 8년 만에 합격 통보를 받았는데, 처음 지원했던 Logistic(군수, 인사, 예산 등) 분야는 경쟁이 치열하니 상대적으로 경쟁이 덜한 Mars Office(해군 항해장교)를 추천하여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합격 통보를 받았지만 해군 본부에서는 신임 장교 훈련 입소가 곤란하다고 했다. 충분히 이해가 되었으며, 아들의 사관생도 3년 차 생활을 이미 들여다본 바여서 전혀 이의 제기할 뜻이 없었다.


군 작전 및 비상 임무 등 모든 명령을 신속히 이해하고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데, 미군 방식인 한국군대 경험이 영국 방식인 캐나다군의 훈련 과정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짐은 당연하다 해도, 부족한 영어와 신체 나이는 극복하기 어렵단 사실을 받아 들여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자랑스럽게 느껴진 것은 캐나다 군 장교시험을 끝까지 완주하여 합격했다는 사실과 아들이 아빠의 꿈을 대신해서 사관학교를  졸업과 동시 임관하여 현역 캐나다 육군 대위로 열심히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감사한 것은 모교, 동아대 학사 학위로써 캐나다 장교시험에서 캐나다 학위와 동등한 자격으로 최종 합격했다는 사실 또한 마음껏 자존감을 높여 주었다. 비록 힘들었던 과정이었지만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고 생각된다.


 
제3장. 자녀교육과 관련한 소중한 경험들

제1절 이민 초기의 가슴 아팠던 사연들


1. 눈물로 시작된 학교 생활, ‘딱 6개월’


남자 아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둘째는 아주 편하고 자연스럽게 학교 생활에 적응했었는데, 첫째 딸애는 성격이 예민한 편이라 고충이 아주 심했다. 특히 캐나다로 오기 전 영어 공부를 좀 시킬까 망설였는데, 해외 주재 경험이 있는 형님께서 굳이 한국 발음에 노출시키지 말고, 현지 영어를 바로 배우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조언으로 별도 교육은 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초기에 더 많은 눈물과 아픔을 겪어야 했나 싶었지만 결국, 형님의 조언이 옳았구나 싶다. 여하튼 한국에서 5, 6학년 한 학기를 마치고 와, 수학 시험만 보고 6, 7학년으로 배정된 아이들의 학교 생활은 날씨로 치면 아들은 쾌청, 딸은 완전 먹구름에 온종일 비였다.


즉 딸애는 등교해서 집에 올 때까지 거의 눈물로 얼룩진 생활이었는데 약 6개월이 지나니 기후 변화가 왔다. 딸아이도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에 미소와 생기가 돌면서 학교 생활이 아주 재미있다고 했다. 정말 다행스럽고 감사했다. 첫 등교 한달 동안은 얼마나 안쓰러웠는지 아내는 이민을 후회 하기도 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은 늘 고통이 따르고 세상엔 공짜가 없는 법이다. 학교 선택은 종교와 인종에 개의치 말자는 폭넓은 취지로 공립학교를 택했으나 예상은 완전 빗나가고 말았다. 즉 한국인 입장에서는 단정한 교복을 입고 절제된 생활을 가르치는 가톨릭 학교와 취향이 맞는 듯 했다.


첫 배정된 공립학교에서 많이 힘들어 했기에 신속하게 가톨릭 학교로 전학한 것은 참 다행이었다. 마침 가톨릭 학교에는 동급생 중 한국 아이도 있어 딸의 심리적 안정도 빠르게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당시 토론토 한인지역 학교엔 한 반에 한국 학생들이 10명이 넘었다고 하니 한국 아이들끼리 몰려 다니느라 영어 배우기가 많이 힘들다고 했다. 반면 오타와에서는 학년 전체에 한국 아이들이 2-3명 수준이었으니 영어를 배운다는 측면에서는 아주 훌륭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가톨릭 학교로 전학하기 전, 공립학교 교장 선생님과 담임 선생에게 항의 방문 했던 것은 죄송한 마음이다. 특히 중동계 학생들이 많아, 딸애를 괴롭혔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들 입장에서 보면 영어를 전혀 못하는 동양계 여학생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한 행동일 수도 있었겠다 싶기 때문이다. 


지나고 나니 모든 것이 추억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당시 가톨릭 학교로 전학 하는데 많은 도움 주신 수녀님께도 감사한 마음 전하고 싶다. 비록 아픈 기억이었다 하더라도 경험한 것을 알리고 소통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 같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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