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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추억

 

 5.18 유가족을 위로하는 문 대통령

 

 

 TV 생중계로 5.18 민주화 기념식을 시청했다. 기념식이 열린 5.18기념국립 묘지는 8년 전 한국방문을 했을 때 찾아가 향을 사르던 곳이다. 그 위치가 미묘했다. 그곳은 지금부터 67년 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피난 갔던 인근이 아닌가. 10살 때 겪은 전쟁은 뒤죽박죽이었다. 


 북한군이 물러간 후 우리 집은 광주에서 목포로 이사를 갔다. 전학증명을 떼어 와야 하는데 그 임무가 주어졌다. 하루 한 번 운행되는 기차를 타고 광주로 갔지만 잘 데를 찾지 못했다. 무작정 길가의 집에 다가가 하룻밤 재워 달라고 외쳤다. 그렇게 하면 으레 받아주는 게 수없이 들었던 옛날 얘기들의 레퍼토리였다. 웬 걸 주인은 문도 열지 않은 채 고함을 쳐 내쫓지 않는가. 근처의 한 데서 쭈그리고 눈을 붙이며 모기떼에게 잔칫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미군의 폭격이었다. 기차역 근처에 집이 있었는데 폭격이 시작되면 집도 흔들리고 몸도 흔들렸다. 사시나무 떨 듯이 라는 표현 이상으로 몸이 진동했다. 비행기의 폭음이 들리면 도망가려고 발을 떼다가도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터지면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그것은 공포가 빨아들인 진공 상태였다.


 기념식에선 감동적인 장면이 있었다. 37년 전 5.18 항쟁 때 아버지를 잃은 여인이 나와 추모사를 낭독했다. 제목은 ‘슬픈 생일’이었다. 그녀는 항쟁이 일어났던 그날 전남도청 앞의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완도에서 근무하던 아버지는 전화를 받고 광주로 향했다. 계엄군이 막고 있었기 때문에 이리 돌고 저리 돌아 걸어서 도착하는데 이틀이나 걸렸다고 한다.


 5월 21일 저녁 계엄군이 총기를 난사하기 시작했다. 갓난아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아버지는 솜이불로 창문을 막으려고 일어섰다. 그 순간 유리창을 뚫고 들어온 총탄이 그를 쓰러뜨렸다.


 전쟁 중 우리도 같은 경험을 했다. 미처 집밖으로 도망가기 전에 폭격이 시작되면 1살짜리 여동생부터 이불 속에 파묻었다. 그때는 도대체 전쟁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고 폭력의 주체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시위에 가담한 것도 아닌 단순 한 양민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폭력은 비켜가지 않았다. 죄가 있다면 국가가 휘두르는 폭력을 피할 수 없는 그런 국가에서 태어난 죄 뿐이었다. 


 한국에서 5.18민주화운동은 아직도 부정하는 기류가 존재하는 듯싶다. 일종의 반란을 계엄군이 진압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심지어 당시 신군부의 실권자였던 전두환은 최근의 회고록에서 5.18을 ‘폭동’이란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고 주장했다. 외국에 살고 있지만 이건 망언으로 들린다.


 설사 ‘폭동’이라고 하면 그 원인이 있었을 거 아닌가. 그 원인제공자가 바로 전두환과 신군부가 아니던가. 그들은 헌정을 중단시키고 국회를 봉쇄했으며 김대중, 김영삼 등 수천 명의 정치인들과 재야인사들을 체포한 다음 계엄 선포를 강행했다. 광주항쟁은 그 여파로 일어났던 것이다. 


 추모사에서 그 여인은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빠, 엄마는 지금도 참 행복하게 살아계셨을 텐데.…”하며 울먹였다. 그걸 들으며 눈물을 흘리던 문 대통령은 다가가 여인을 부둥켜안았다. 국가가 저지른 폭력에 대해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사죄와 위로의 포옹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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