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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보경 칼럼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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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20)-“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

 
 

 (지난 호에 이어)
 사람의 마음에 선악이라는 관념이 생기면 하늘과 땅, 밤과 낮, 음과 양이라는 자연현상까지도 선악이라는 관념으로 오염시키게 된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이 금한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자신들의 벌거벗은 육체를 가릴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는 것이나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없어서 나무 사이에 자신들의 몸을 숨겼다고 하는 것은 곧 선악이라는 간교한 마음이 그들에게 들어옴으로 해서 이전에는 벌거벗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수치스럽다는 생각조차 없었는데도 이제는 그것을 감추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된 것이다. 


 구약성서에는 선과 악이라는 관념이 뚜렷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지켜 온 십계명이 그 예다. 그러나 신약에서의 특징은 구약에서의 선악이 사랑으로 바뀐다. 선악이라는 정죄가 아니라, 용서와 사랑이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예수님의 언행은 선악이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경계가 아니라, 선이라는 관념이나 악이라는 관념만 없어지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만물이 하나님이 본래 만드신 아름다운 그 모양 그 모습으로 되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한 것은 선으로 악을 이김으로써 선이라는 관념도 악이라는 관념도 없이 세상을 보고 이웃을 보게 될 때 그 안에 은혜와 지혜가 넘쳐흐름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다. 선이라는 관념이 계속 마음에 남아 있는 한, 악이라는 관념 역시 계속 남아 있게 된다. 선악이라는 생각조차 없을 때 인간은 자유롭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라를 낙원으로 향유할 수 있게 된다. 


 산과 물은 함께 있으나 산은 물을 안다고 하지도 않고 물을 부러워하지도 않는다. 물 역시 산과 함께 있으나 물이 산을 안다고 하지도 않고 산을 부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선악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하는 인간은 서로 시기하고 원망하고 소원하고 한탄스러워하고 갈망한다.


 깨달음이란 선악이라는 인간의 “발명품”이 자신을 고통에 빠지게 하는 동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나라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의 눈은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환하게 열려 자신들이 하나님보시기에 열등하고 부끄러운 존재임을 느끼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인간의 탐욕이 시작되고 죄를 짓게 되었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선(禪)에서 “중도를 간다”는 것은 선이나 악, 그 어느 한 가지에 치우침이 없이 그 중간을 택한다는 것이 아니라, 선이라는 관념도 없고, 악이라는 관념도 없는, 마치 부모의 품안에 안긴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또는 “산이 구름과 함께 있으나 산이 구름을 안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무념으로, 자신이 이전에는 선이나 악이라는 고질적 관념으로 이웃을 정죄하던 버릇에서 벗어나, 서로 거역함이 없고, 서로 장애가 없는, 진실한 모습의 세계를 체험하고 체득하게 됨을 뜻한다.


 인간의 눈에는 선악이 있고, 미추가 있고, 귀천이 있어서 귀한 사람, 천한 사람도 있고, 밟아 죽여도 괜찮을 벌레도 있고, 아름답다고 잡아 와서 새장에 가두어 둘 새도 있지만 자연에는 선악이나 미추나 귀천이란 관념이 없다. 인간의 눈에 미천하게 보이는 땅 속의 벌래도 하늘로 훨훨 자유롭게 날 수 있는 날개를 펼칠 지혜를 가지고 있다. 자연은 그렇게 설법(說法)을 한다. 인간의 선악이나 미추나 귀천이라는 지식이 얼마나 허망하며 망상적인 것인가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라는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로 가득 차 있다. 인간 역시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로 이웃과 한 몸을 이루며 하나님의 은해와 지혜를 숨 쉬고 있다. 인간의 몸이 곧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인간은 인간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악이라는 경계, 미추라는 경계, 귀천이라는 경계 안에 자신들을 가두어 스스로 자유를 잃게 한다. 중도를 간다는 것은 이러한 자신을 스스로 옭아매는 무지라는 동아줄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임을 뜻한다.


 선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에서 보면, 율법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누구보다 칭찬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을 그들 위에 두셨다.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에서 선악이라는 양변(兩邊)이 사라진 사랑을 보셨기 때문이다. 


 중도란 곧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성도를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로 보게 되면, 중도가 무엇인지가 보인다. 도의 목적 역시 양변을 여윈 중도에 있다. 그것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선악이라는 양변을 여윈 경지가 아니면 원수를 사랑할 수는 없다. 중도가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 곧 견성이며 깨달음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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