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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경기도 여주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기도 광수중학교 근무, 1992년 캐나다 이민, 캐나다문인협회 수필 부문 입상, 2006년 해외동포문학상, 작품집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나이만큼 행복한 여자>, <밀리언 달러 티켓 나도 한장>,<행복이라는 이름의 여행>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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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구니 안의 아밀리아
hansoonja


 

 큰딸아이가 출산을 앞두고 있어 우리 내외가 딸네 집으로 가서 모여 앉았다. 딸아이 부른 배를 보며, 내가 보기엔 나 큰 아이 임신 했을 때보다 배가 더 부른 것 같지는 않게 보였는데 남편 눈엔 나 보다 더 부르다고 얘기하는 것은, ‘순산’해야 할 텐데 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음으로 보였다.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대화가 딸아이들을 낳아 키우면 서의 얘기를 하다가 남편이 딸에게 아기 이름을 지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동안 수 백 개의 이름을 보고 골라 보았건만 그 중에도 ‘아밀리아’란 이름이 제일 마음에 들어 그 이름으로 결정할까 보다고 했다. 우린 예정일이 좀 남았으니 그 사이 다른 이름으로 물색해 보자고 하였으나 더 좋은 이름도 찾아 내지 못하고 결국 아밀리아로 출생신고를 해야 했다. 


 예정일이 크리스마스 날이니 예정일 전후로 해서 진통의 기미가 보이면 바로 병원으로 갈 수 있도록 아밀리아 맞을 만반의 준비를 해 놓았다고 한다. 예정일이 특별하다보니 24, 25일 일까 은근히 긴장이 되었다. 


 드디어 예정일을 지나해를 넘기고 있어 혹시 ‘뉴 이어 베이비’가 될지도 모른다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래도 1월 1일을 넘기고 아침결에 전화가 왔다. 진통이 시작되긴 했어도 병원에서 기다리는 시간을 줄여 보려 집에서 지체하다 병원에 가기를 새벽 2시라고 했다. 


 수화기를 놓고 보니 내가 딸들을 낳던 순간이 어제인 양 다가 왔다. 우리 때만해도 임부복이 있어 펑퍼짐한 옷으로 불러 온 배를 적당히 가리듯 하고 다녔다. 그러나 요즈음은 출산율이 떨어지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임신한 것이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듯 배를 가리기는커녕 일부러 몸에 착 붙는 옷을 입고는 나 ‘임신’했다고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배는 내 밀고 양 어깨는 뒤로 넘기며 거만한 모양새로 보이기도 하니, 안면이 있는 사람에겐 축하한다고 말을 건네기도 하지만 불룩 나온 배가 쳐다보기도 민망할 때가 많다. 


 첫애나 둘째 아이 때도 폭이 넓은 홈드레스 덕분이었는지 나 자신도 배가 그렇게 부른 것 같지 않다 싶었는데 딸들을 순산했다. 큰아이 때는 집에서의 진통은 모르겠고 남편과 같이 병원엘 갔다. 분만실인 온돌방으로 안내가 되었다. 진통이 시작되는지 배가 싸르르르 아프다가 멎고, 또 그렇게 싸르르르 아파오기를 잦아지니 너무 아프기도 이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는 게 아닐까 두려워 옆에 앉아 있던 남편의 손을 꼭 잡든지, 팔을 뒤틀든지 해야 했다. 


 그렇게 진통하던 순간은 기억이 나는데 정작 애를 낳던 그 ‘극적인 순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중에 아기를 낳고 시간 계산을 해 보니 거의 12시간 가깝게 진통을 한 거였다. 첫째 아이 때 그랬기에 둘째 아이도 그 시간 정도는 지나야 하리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둘째 아이 때는 마침 캐나다에 계셨던 큰아주버님이 나와 계시기도 했고 첫아이를 딸을 낳고 보니 조금 불안하기도 해서 예정일이 가까워 오면서는 매일같이 목욕을 하고 진통이 오나 기다리게 되었다. 진통이 시작되는 것 같다 싶으면 나 혼자 슬그머니 병원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것은 으레 아들이려니 하다가 딸을 낳았기에 은근히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 10시가 넘어서 진통이 슬슬 오는 것 같았다. 첫아이 경험으로 봐서 10시간 정도로 보면 한참을 더 있어도 될 것 같았다. 배가 아프기 시작하고 아직도 몇 시간은 더 있어야 되겠다 싶기도 했지만, 그 정도쯤에서는 병원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아주버님이나 남편 몰래 가서 낳아야지 벼르고 있었는데 그 시각엔 남편이 집에 같이 있어 남편과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병원에 들어서며 진통이 시작된 지 몇 시간이 되었다고 하니 의사가 좀 보자고 하더니, 금방 나오게 생겼다며 급하게 분만실로 옮겼다. 분만대에 올라가 몇 번 힘을 준 것 같은데 “딸입니다” 하는 간호사의 음성이 들렸다. 난 순간 쪼금 서운하고 허전한 것 같긴 했는데 이렇게 아파서 낳은 딸이 참 소중하다 싶었다. 


 작은 딸을 낳고 회복실에 누워 있는데 아주버님이 큰딸아이를 데리고 왔다. 엄마가 집에 없는 사이 아이는 울기도 했는지 얼굴은 땀이 배어 얼룩져 있었고 옷도 더렵혀져 있었다. 엄마한테 오면서 들고 온 책을 내게 내밀며 읽어 달라고 보채듯 했다. 그랬던 큰딸이 배가 나보다 더 부른 것 같더니 진통이 시작되어 병원에 있다고 전화가 온 것이다. 그 후 두 딸들을 어떻게 키웠는지 생각나는 것도 별로 없는데 할머니가 되겠네 싶은데도 덤덤했다.


 병원엔 열일 제쳐놓고 가야하니 오늘 스케줄을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릿속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난 분만실엔 들어가지 못하는 줄 알고 아기를 낳거든 가야지 하다가 전화를 걸어 물어 보았더니 분만실에 들어 갈 수가 있다고 하니 아기를 낳기 전에 ‘장미꽃’이라도 사 들고 가야 할 것 같아 서둘렀다. 


 60평생을 살면서 누구에겐가 주려 장미꽃을 사 본 기억은 없는 것 같다. 꽃이 비싸기도, 그럴만한 일이 없기도 했나보다. 그런데 첫 번째 맞는 ‘손녀’한테는 화사한 꽃다발이라도 안고 가서 맞이하고 싶었다. 이미 딸임을 알고 있는 상황이어서 딸일까 아들일까 설레며 기다리는 마음은 없었다.


 작은 딸과 집에서 가까운 슈퍼마켓엘 들르니 살만한 꽃이 없어 일단은 그냥 가기로 했다. 병원에 당도해서 난 예전의 나를 상기하며 딸아이는 잔뜩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하며 세환이(사위)의 손과 팔을 힘차게 쥐고 있겠지 상상하며 분만실에 들어서니, 아이의 심장박동 소리는 힘차게 들리는데 딸아이는 ‘무통분만’ 주사를 맞았다는데 별다른 진통도 없이 일반 환자처럼 편하게 누워 있었다.


 무통분만, 우리 때는 들어 보지도 못했던 말인 것 같다. 예전엔 자연분만을 하는 여자들은 극히 정상이고 제왕절개 수술을 하는 여자들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딸아이를 보니 통증도 없이 이렇게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그래도 세상에 새 생명이 탄생 하는 것인데 진통은 겪으면서 아이를 낳는 게 더 나은 것 아냐 하다가도, 아프지 않고도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굳이 고생을 하면서 아기를 낳겠다 할 여자가 있을까 잡다한 생각들이 오갔다. 


 우리가 그곳에 당도하고 나서도 간호사 의사가 번갈아 드나들며 두 시간이 되어 오는데 바로 낳을 기미가 없어 우린 나중에 다시 오기로 하고 그곳을 나왔다. 난 우선 꽃이든 꽃 화분이라도 사야 할 것 같아 다시 다른 슈퍼마켓엘 들렀다. 마침 마음에 드는 화분이 있어 똑 같은 것으로 두 개를 샀다. 


 꽃 이름이 ‘azalea’는 한국말로 진달래였다. 꽃빛깔이 영락없는 진달래로 이곳에서는 산에서는 볼 수 없으나 꽃집에서도 드물게 만날 수 있는 이 꽃은 어릴 적 소풍 길에 보았던 그 꽃을 만난 듯 반갑기 이를 데 없었다. 


 아기는 오후 다섯 시에 낳았다고 한다. 일을 끝내고 남편과 같이 꽃 화분을 들고 아밀리아와의 첫상봉을 하기 위해 회복실로 들어섰다. 난 아기와 같이 꽃 화분을 놓고 기념사진이라도 찍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가 커가며 그 순간을 상기하며 아이와 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남편은 꽃가루 때문에 아이에게 좋지 않을 수도 있다며 그냥 지켜 보기만하라고 애한테 당부하듯 해서 설레고 부풀었던 마음을 접어야 했다. 


 딸아이가 안고 있는 아기는 마치도 ‘예쁜 인형’처럼 그렇게 보였다. 딸들을 낳았을 때의 모습은 기억도 희미하니 손녀의 모습만큼은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작은 인형은 얼굴을 찡그리기도 미소 짓기도 입을 삐죽이며 우는 시늉을 하기도 꿈을 꾸는 듯 얼굴표정이 바뀐다. 


 얼굴도 자그마한 아기, 예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아기, 점차 커가면서 모녀의 재잘거림이, 개 세 마리까지 데리고 아밀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그들의 즐거운 나들이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딸아이가 퇴원을 하면서 병원에서 찍은 사진을 갖고 왔다. 그 사진들을 보는 동안 ‘바구니 안에 담긴’ 살아 있는 인형을 보며 감탄이 절로 나왔다. 우리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 그런 사진이 나올 리 없었다. 평생 간직하게 될 소중하고 값진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딸아이들을 키울 때는 직장생활도 하지 않았건만 살림하며 아이들 키우는 것이 너무 힘이 들었다. 그랬기에 예쁜지도 모르고 키운 것 같다. 게다가 난 아이와 ‘같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해 본 것이 거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딸아이는 가급적이면 모녀가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고려한다.


 나를 실현해 보고 싶은 욕구가 많은 것보다는, 너무 욕심내지 않고 즐겁게, 또 즐기며 사는 딸이 키워 낼 손녀는, 앞으로 아밀리아가 결혼을 할 때쯤이면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 있을까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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