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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왜 실패하나(14)-고종, 민비 그리고 김옥균(상)

 서론

한 개인은 산속에 들어가 땅을 일구며, 조용히 은둔의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국가가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조선이 그러했다. 왜 그랬을까?


 시대 상황

1392년, 이성계가 세운 조선 왕조는 500년 역사 중 후반기에 들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먼저 우리가 잘 아는 당파 싸움인 4대 사화(1498-1545: 무오, 갑자, 기묘, 을사 사화)가 1세기 동안 이어지며 나라를 찢어 놓더니, 외침을 불러들여16 세기 임진왜란(1592-1598), 17세기 병자호란(1636-1637)으로 이어지고, 이러한 혼란에 더하여 조선의 곡창, 전라도에 연이은 가뭄이 들어(1876~1888), 백성의 먹는 문제가 어려워졌다.


당연히 조세수입이 떨어진 조정은, 이미 고달파진 백성의 어깨에 더 높은 세금을 부과해야 했고, 이는 농민들에게 가혹한 수탈이 되어 반란이 끝이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동학란으로 확대된다(1890).


 불운은 혼자 오지 않는다는데, 19세기 내내 10대의 어린 소년이 왕위에 오른다. 23대 순조가 10살에, 24대 헌종이 8세에, 25대 철종은 강화도에서 농사일을 하다가 19세에, 26대 고종은 마당에서 연 날리기를 하다가 가마를 타고 궁에 들어와 12세에 왕이 되니, 국운이 다하였는가 조선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전 근대성 유교 의식

 '공자왈, 맹자왈’ 의 유교 정신 세계는 중국에서 발현됐으나, 이것이 한반도에 유입된 후 중국에서보다 조선에서 더욱 발전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일찍이 왕과 신하 사이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인륜, 도덕으로 충과 효를 강조해 왔고, 이는 조선이 유교를 국교로, 통치 이념으로 삼으면서 절대군주 체제하에 흔들 수 없는 원리로 발전됐다.


이의 위반은 강상죄라 하여 엄히 다스렸을 뿐 아니라, 일찍이 신라의 화랑 5계, 고구려의 5경을 거쳐 면면히 내려와 충, 효 사상은 백성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국가가 순조로이 유능한 성군 밑에 운용될 때 이는 미덕이 될 수 있으나, 나라가 위태롭고 쇠락할 때는 허망한 사상이고, 가난을 해결하는 데는 전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더욱, 민생이 상하를 막론하고 핍박해질 때, 유교에 내재된 신분차별의식은 상위 신분의 수탈을 정당화 해주고, 이로 인한 하위신분 백성의 배고픔은 당연시 되었다.

양반들은 노동을 멸시하여 천한 것들이나 일을 하는 것으로 알고, 굶어 죽을 망정 노동은 피했다. 백성이 자기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고 생각해 수탈했고, 수탈에 지친 백성은 아무리 뼈빠지게 일을 해도 어차피 빼앗길 것이니 일할 의욕을 상실한다.


 잠시, 영국 여행가 버드비숍이 본조선의 모습 ‘조선과 그 이웃들’(1897)을 보자. 그가 처음 부산에 도착했을 때, “좁고 더러운 거리에는 나무 가지에 진흙을 발라 만든 야트막한 오두막집이 늘어서 있었고, 집 밖에는 쓰레기가 차있는 도랑이 있고…”


“서울이 지독한 냄새가 풍기는, 한 나라 수도 치고 비천함을 이루 말할 길이 없다…. 대부분 성읍에서는 한국인이 하루 반 이상을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기나긴 휴식 시간에 문턱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거나, 바닥에 누워 잠을 잔다. 이 때, 집 앞 뚜껑 없는 하수구에는 하도 냄새가 역겨워… 그들은 관리의 수탈에 완전히 마비되었다. 관아의 요구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오직 극심한 가난상태로 스스로 전락하는 것뿐임을 잘 알고 있어, 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


조선은 그 시절에 그러했다. 도시의 좁은 길이 넓혀지고, 하수구가 복개된 것은 1914년 도시계획 이후였다.


 고종의 지도력

22세에 아버지 대원군에 이어 친정을 시작한(1873) 고종은, 내심 개화 쪽에 기울어져 있었으나, 주위의 쇄국 파와 민비 척신들의 반대 속에 전전긍긍하는 상황이었다.

강화도조약 5년 후인 1882년 2월, 고종은 옆 나라에서 근대화를 한다는데 좀 보고 와야겠다 싶어, 남도에 암행어사로 갔다 오라고 박정양에게 밀지를 내린다. 원래 암행어사는 밀지를 받으면 집에도 알리지 않고 즉시 떠나는데, “밀지를 집에 가서 읽어보라”하더니, 그게 아니고 “'일본에 가서 보고오라, 급하지 않으니 며칠 준비해서 다녀오라”였다.


부산에 내려오니, 김옥균 외 개화파 관료 11명이 같은 식으로 와있었다. 일본배를 빌려 타고 일본에 건너가 소위 근대화 현장을 살피고 있는데, 이것이 일본 신문에 실렸고, 조선 조정에 알려졌다.

“도대체, 그들을 왜 보냈습니까?” 개국을 반대하는 수구파가 고종에 대들었다. “허… 내가 보낸 게 아니라니까 그 양반들이 유람을 간 게지!'' 이렇게 해서 비밀리에 시작한 첫 해외시찰단이 신사유람단이라는 멋진(?) 이름을 갖게 된다.


고종은 내심 근대화를 생각하며 시작한 사업이었으나, 지원금을 더는 보낼 수가 없어 이들은 4개월 만에 귀국한다. 지원금이 떨어져 거지꼴이었다고 한다. 군주가 소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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