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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블랑카(Casablanca)" (5끝)

2015-04-10

"카사블랑카(Casablanca)" (5끝)

 

등장인물의 캐릭터, 인상적인 대사, 주제음악 등
어우러진 전설적인 명화 

 

 

 카사블랑카에 삽입된 "As Time Goes By"는 허만 허펠트(Herman Hupfeld, 1894~1951)가 1931년 Everybodys Welcome이란 브로드웨이 쇼를 위해 작곡한 노래였기 때문에 아카데미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그래서 맥스 스타이너가 새로 만든 곡으로 대체하기 위해 재촬영을 하려 했지만 잉그리드 버그만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마리아 역을 위해 이미 머리를 숏커트한 상태여서 촬영이 불가했다는 후문이다.


 그래서 대신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와 독일군의 노래의 대결 구도로 분위기를 바꾸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출연진 대부분이 유럽 출신이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유태인 또는 피난민으로서 실제 절망적이고 눈물겨운 체험을 했던 배우들이라 나치 역을 맡은 배우들도 물론 이 카사블랑카의 국가(國歌)의 대결 장면에서 감정에 북받쳐 많이들 울었다고 한다. 또 이 영화를 하버드대에서 처음 상영하였을 때 이 장면에서 라 마르세예즈를 모두가 따라서 불렀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1998년에 마이클 월쉬가 위의 노래와 같은 제목으로 쓴 소설 As Time Goes By는 110만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그 성공의 요인은 책의 엔딩이 영화의 마지막 귀결의 정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은 제작된지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카사블랑카의 열렬팬이 아직도 많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마이클 커티즈(Michael Curtiz, 1886~1962) 감독은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신으로 유럽에서 50여 편, 미국에서 100여 편을 감독했는데 1930~1940년대 워너브라더스 영화사의 전성기에 활약하였다. 가장 잘 알려진 영화로는 소돔과 고모라(Sodom and Gomorrah•1922), 노아의 방주(Noahs Ark•1928)를 비롯하여, 에롤 플린 주연의 로빈 후드의 모험(1938), 제임스 개그니와 험프리 보가트 주연의 더러운 얼굴의 천사(Angels with Dirty Faces•1938), 제임스 개그니 주연의 양키 두들 댄디(Yankee Doodle Dandy•1942) 등이 있으며, 특히 빙 크로스비와 로즈마리 클루니 주연의 화이트 크리스마스(White Christmas•1954)로 우리 기억에 남는 명감독이다. 


 그가 만든 작품 중에 특기할 만한 것을 언급해 보면, Santa Fe Trail(1940)에서 에롤 플린과 함께 로널드 레이건(미국 제40대 대통령 역임)이 주연했고, 아버지와 인생을(Life with Father•1947)에서는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아역배우로 출연했으며, Romance on the High Seas(1948)에서 도리스 데이를 데뷔시키기도 했다. 또 열정의 무대(King Creole•1958)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와 월터 매타우(샤레이드에 출연)가 공연하기도 했다.


 마이클 커티즈 감독은 평생토록 영어에 익숙해지지 못해서 그와 관련된 많은 일화가 있다. 1944년 3월2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카사블랑카로 최우수 작품상, 최우수 각본상을 비롯하여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하게 되었을 때 연설문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그는 어눌한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 "So many times I have a speech ready but no dice. Always a bridesmaid, never a mother." 

 

 


 또 한번은 카사블랑카 촬영현장에서 푸들(poodle)을 준비하라고 지시했지만 사실 그의 의도가 조그만 물웅덩이(a puddle of water)였다는 것을 알고 세트디자이너가 당혹해 했다고 한다. 또 영국 배우 데이비드 니븐은 자신의 비망록 두 번째 책의 제목을 Empty Horses라고 붙였는데, 그것은 커티즈 감독의 말실수 중에서 사실은 기수 없이 말만 가져와라(horses without riders)는  의도였는데 속이 비어있는 말을 가져와라(empty horses)라고 말한 데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스웨덴 스톡홀름 태생의 금발 벽안(碧眼), 뚜렷한 이목구비를 갖춘 큰 키의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 1915~1982)은 17세 때인 1932년 장학금을 받고 스웨덴 왕립연극예술아카데미에 입학해 연기를 배웠고 스웨덴과 독일 영화계에서 활동하다, 1936년 간주곡(Intermezzo)에 출연한 것이 헐리우드 영화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의 눈에 띄어 1939년 미국으로 오게 된다. 그해 간주곡의 리메이크작 이별(Intermezzo: A Love Story)에 출연하며 헐리우드에 데뷔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당시 영어도 못했고 키가 너무 크고 높다란 코와 짙은 눈썹을 가진 외모에 독일식 이름을 가진 그녀였지만 결코 이를 고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장끼 없는 자연미 그대로의 순수하고 신선한 미모와 개성 때문에 헐리우드의 성형미녀들을 제치고 성공하는 비결이 되었다.

 

 

 


 그런데 버그만 자신은 카사블랑카를 그렇게 썩 좋은 작품으로 평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해인 1943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아카데미 주연상 후보에 오르고 그 다음해 가스등(Gaslight)으로 아카데미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1945년 세인트 메리의 종(The Bells of St. Marys)에서 최우수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라 3년 연속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되는 기록을 세웠다. 지금까지 캐서린 헵번이 세운 4번 연속 기록이 최고이다. 그밖에 2개의 에미상, 4개의 골든글로브상과 토니상을 수상했다. 


 알프리드 히치콕 감독과도 인연을 맺어 백색의 공포(Spellbound•1945), 오명(Notorious•1946) 그리고 칼러 작품인 염소자리(Under Capricorn•1949) 등 3편에 출연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1906~1977)와의 열애로 배우 경력 최고의 위기에 맞닥뜨리게 된다. 버그만은 로셀리니의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아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로셀리니 씨, 당신의 영화 무방비 도시(Open City)와 전화의 저편(Paisan)을 봤습니다.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만약 스웨덴 여배우가 필요하다면, 그녀는 영어는 아주 잘하고, 독일어는 아직 잊지 않았고, 프랑스어는 썩 잘하지는 않고, 이탈리아어는 오직 ‘당신을 사랑해(ti amo)’만 알고 있는 배우인데요, 저는 당신과 함께 일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잉그리드 버그먼.”


 버그만은 이윽고 정말로 로셀리니의 곁으로 달려가 로셀리니의 영화에 출연하며 로셀리니와 사랑에 빠졌다. 문제는 로셀리니가 유부남이었고 버그만 역시 남편과 딸이 있는 유부녀였다는 것. 이 불륜 사건은 1940년대 미국에 파란을 일으켰고 거센 비난 여론이 일었으며 버그만은 결국 헐리우드에서 실질적으로 추방당하게 된다. 이후 남편과 이혼하고 로셀리니와 결혼해서 아들 하나와 쌍둥이 딸을 두었다.   


 그러나 로셀리니와 헤어진 버그만은 다시 미국 영화계로 복귀한다. 6년의 시간이 흐르며 여론도 누그러져 1956년 추상(아나스타샤)에 출연하면서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데 절친한 친구 캐리 그랜트가 대신 받아줬다.   


 1972년 유방암 선고를 받았으나 연기에 매진, 1974년 단역으로 출연한 오리엔트 특급살인(Murder on the Orient Express)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1978년 마지막 영화 출연작인 잉마르 베리만의 가을 소나타에서 명연을 펼쳐 아카데미 후보에 오르고 4년 뒤 세상을 떠났다. (본보 2014년 9월5일자 이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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