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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보경 칼럼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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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40)-“우리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21)

 

 (지난 호에 이어)
정혜에 비교되는 용어로 불교에는 지관(止觀)이 있다. 고른 숨을 유지하면서 불안이나 분노를 일으키는 상황을 피하지 않고 지관 또는 정관(靜觀)하는 것이다. 심신을 안정시키는 이완반응(relaxation response)를 바탕으로, 이완을 방해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스트레스나 불안이나 공포를 소거시키는 방법이 정혜며 지관에 속한다. 


종교라고 해서 인간의 마음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불교나 기독교는 특히 본심을 방해하는 망심을 제거하는 방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비록 기독교는 불교와는 다르게, 창조주하나님을 공경하고 정성을 다하여 섬기도록 하고 있지만 그것 역시 “자신이 곧 성전”이란 깨달음으로 하나님이 자신 안에, 자신이 하나님 안에 거하는, 동체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망심으로부터 본심을 되찾게 하는 선의 목적과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망심이란 이전 경험으로 본심이, 예를 들어 욕심이나 분노나 두려움이나 무지에 엉긴 마음이다. 그러므로 탈학습이란 견성이나 ‘거듭 남’을 위한 필수적 과제다. 자신의 본심으로서의 성전이 되거나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自己)라는 고정(固定)된 실체가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선악으로 정죄하는 마음으로는 악을 없애지 못한다. 선악이라는 관념이 존재하는 한 악이라는 관념이 없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의 마음과 같이 선악이라는 관념조차 그 안에 없을 때가 아니면 예수님처럼 무조건 사랑과 무조건 용서를 실천할 수 없다. 


예수님의 마음을 어린아이의 마음과 같은 것이라 하기도 하도 어린 양에 비유한다. 어린 양의 특징은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데 있다. 그에게는 억지로 착하게 되려는 마음도 없고, 그는 억지로 무엇인가를 잘 하려는 마음도 없다. 어린아이의 마음 그대로만 나타내면 그것이 사랑이라는 관념도 없이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또한 용서한다는 마음도 없이 용서하게 되는 것이다. 


우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거듭 남’으로 하나님과 화해하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도적의 소굴’이 되어 버린 자신을 없애버리고 거기 다시 성전을 세우는 것이다. 자신이 곧 성전이란 말은 자기가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는 다르다.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전(澱)에 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의 회귀다.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로 선전을 재건하신 것과 같이 개개 인간도 죽음과 부활로 자신을 재건하여야 한다. 선에서도 지금의 ‘나’(自己)라고 하는 것은 마치 “밖으로부터 몰래 침입한 ’도적‘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과 같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자신이 곧 성전이라 하거나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무아 또는 공의 본의 역시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불교와 기독교 양자 모두 견성 또는 ‘거듭 남’에 목적이 있다면 그러한 공통적 목적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서로 소통할 수 있다. 특히 선에서는 망심을 본심으로 되돌리게 하는 방법으로 지금의 행동치료(行動治療)에 비교되는 다양한 전략들을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숨을 헤아리게 하는 방법, 고른 숨을 쉬게 하는 방법으로 수식관(數息觀)이라는 것도 있고, 심상(心想)을 이용하여 육체적 탐욕이나 분노를 통제하는 인지-행동적 접근법도 있고, 최종적으로 한 생각도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참선법도 있다. 다시 말하면 ‘거듭 남’이라는 신앙생활의 목표를 성취하는데 있어서 기독교에서 요구될만한 구체적 방법들이 선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말이다. 


‘불교’니 ‘기독교’니 하는 인간이 임의로 붙인 명칭에만 집착되지 않는다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담의 자손이고 노아의 자손이다. 그리고 인간이면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명칭이 다르다고 서로 대적하는 것은 아담으로 하여금 낙원으로부터 쫓겨나게 한 바로 그 망심, 즉 아담과 이브를 유혹한 뱀 또는 사탄의 역사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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