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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의 大佳里(대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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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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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7
달력 얼마나 정확할까?(2)

 

 

요즈음 사용하는 태양력의 변천사

로마시대 초기에는 춘분을 1년의 시작으로, 1년을 10개월로 하고 1년의 길이는 304일로 하는 기이한 달력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 뒤를 이어 로마황제가 된 누마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710년경에 2개월을 추가해 1년을 12개월로 하고, 길이를 355일로 하는 누마(Numa)력으로 개력했습니다. 그러나 이 달력은 여전히 1태양년의 실제 길이와 11일 정도 차이가 나 사용하는데 많은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그 뒤 율리우스 시저의 집권 시대인 기원전 46년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인 소시게네스의 조언으로 1년을 365일로 하는 새 달력을 만들었습니다. 이 달력에서는 오늘날과 같이 한 달의 길이를 31일과 30일을 번갈아 넣었으며, 달의 크기는 원칙적으로 홀수인 달을 31일로 하고, 짝수인 달은 30일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평년을 365일로 하기 위해 2월에서 하루를 떼어 내 29일로 했으며. 윤년인 경우는 2월을 30일로 했습니다.

 

춘분날은 누마 왕 때와 마찬가지로 3월23일로 정했으며, 태양력의 1년 길이는 365.25일로 매 4년마다 윤년을 두었습니다. 이것을 율리우스력이라고 합니다.

율리우스가 개력을 할 때 계절과 달력의 날짜가 이미 3개월이나 차이가 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리우스는 23일짜리 윤달과 67일짜리 윤달을 끼워 넣어 계절을 맞췄었기 때문에 기원전 46년은 실제로 445일이나 되는 긴 해였습니다.

이에 따라 모든 달이 두 달씩 미뤄져 당시에 5월을 의미하는 퀸틸리스(Quintilis)가 7월이 되자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자신의 생일 달의 의미를 지닌 율리(July)로 개칭했습니다. 그러므로 7월(July)의 영어 명칭은 율리우스의 생일 달이라는 의미인 셈이지요.

 

그 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트라키아와 아크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기 위해 8월의 본래 명칭인 섹스틸리스(Sextilis, 제6번째 달이라는 의미)를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고 바꾸었습니다. 더욱이 황제인 자신의 달이 다른 달보다 작으면 황제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면서 2월에서 하루를 떼어와 31일의 큰 달로 변경했습니다. 그러자 1월에서 7월까지는 홀수인 달이 큰 달이 되고, 7월과 8월이 연속해서 큰 달이 된 바람에 9월부터 12월까지는 짝수 달이 큰 달이 됐습니다. 이 때문에 2월달이 다른 달에 비해 유난히 작아져 버린 채 1582년까지 사용되어왔었습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완전히 도는데 걸리는 시간인 1년의 길이는, 현재 달력이 사용하는 1년 길이인 365.2422일에 비해 0.0078일이 길다고 합니다.

이는 약 11분 14초에 해당하지만 128년이 지날 때 마다 태양년의 길이가 하루씩 더 길어지게 되지요. 이 때문에 춘분날이 128년마다 하루씩 앞당겨지게 돼, 로마 교황 그레고리 13세 때는 큰 문제점으로 부각되었습니다.

당시 유럽의 모든 국가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고 있었기에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행사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날인 부활절이 1582년에는 3월 11일로 본래의 위치에서 이미 10일이나 크게 앞당겨져 있었기에 이는 종교적으로 큰 문제였습니다.

 

그레고리 13세는 이를 본래 지키던 부활절로 되돌려 놓기 위해서 개력을 단행했습니다.

새로운 달력에서는 우선 태양년의 길이가 실제와 거의 같도록 윤년의 횟수를 조정했습니다.

서기 연도가 4로 나누어지는 해를 윤년으로 정하고, 동시에 100으로 나누어지는 해는 평년으로, 다시 400으로 나누어지는 해는 윤년으로 정했습니다.

예를 들어, 서기 1900년은 평년이고, 서기 2000년은 윤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로 400년간 윤년을 1백회 두던 규칙을 97회 두는 것으로 고쳤지요.

이렇게 하면 1태양년의 길이가 365.2425일이 돼 실제의 길이인 365.2422일과 거의 유사한 값이 됩니다.

 

그 옛날에 이 정도로 계산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참 대단하지요?

그래서 부활절을 다시 정한 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는 “춘분 날 후 첫 번째 오는 보름을 지나 첫 번째 일요일”로 정해졌던 것입니다.

만일 첫 번째 오는 보름날과 일요일이 겹쳐지면 다음 주 일요일을 부활절로 지킵니다.

 

춘분날의 위치를 부활절 제정 당시의 날짜인 3월 21일로 되돌려 놓기 위해 1582년10월 4일 (목요일)의 다음날을 1582년 10월 15일 (금요일)로 변경했습니다.

따라서 1583년부터는 춘분날이 3월 21일로 밀려나게 되었고, 1582년 10월 5일부터 14일까지의 날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날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세상에 태어남도, 죽음도, 전쟁도 없었던 유일한 망각 속의 10일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때 날짜는 건너뛰었지만 요일은 그대로 이어진 새 달력을 그레고리력이라 하는데,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양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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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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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5
달력, 얼마나 정확할까?(1)

 

어느 집에나 하나씩은 걸려 있는 달력은 우리가 세상살이를 하는 동안 서로가 인정하는 가장 필수적인 물건 중의 하나입니다.

유목 생활을 하던 인간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면서 농경생활로 삶의 방식이 바뀌던 시절, 점점 커져가는 사회와 복잡해지는 생활 수단에 필요한 통치와 교역을 위해서는 서로가 동의할 수 있는 정확한 날짜와 연대 계산을 요구하는 원칙이 필요하게 되었지요.

고대사회에서 나라의 제사를 주관하던 제사장들이 주로 천문을 연구하며 지상에서의 일들을 예측하였기에 이들의 경험과 지식과 기억을 바탕으로 달력을 만들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고대 문명 발상지였던 메소포타미아와 나일강 유역의 큰 제국들 중 이집트는 태양의 움직임을 기초하여 태양력을 만들었고, 바빌로니아와 앗수르에서는 달의 움직임을 기초하여 태음력을 만들었으며, 동양의 중국에서도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바빌로니아와 앗수르의 영향 때문인지 태음력을 만들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세종대왕 때까지 중국에서 만든 달력을 매년 하사 받아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달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달력을 구성하는 “년”, “월”, “주”, “일”을 나타내는 기준이 있어야 하고, 또 그 기준을 잴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만 합니다.

년(年)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완전히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을 나타냅니다.

월(月)은 보름달과 다음 보름달 사이의 시간을 나타냅니다.

일(日)은 해가 남중 했다가 다음 남중 할 때까지의 시간을 나타냅니다.

주(週)는 기원전 7세기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사람들은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에 쉬는 주(週) 7일 제도를 시행하였는데, 현재와 같이 일요일이니, 월요일이니 하는 요일명이 붙게 된 동기는 로마 콘스탄틴 황제의 명령에 의해서입니다.

 

이 당시에 벌써 해와 달, 별을 관찰하여 시간의 흐름을 파악하고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눈 후, 오늘날에도 놀라울 정도로 고도의 정확성을 가진 여러 가지 연대계산 체계를 발전시켰음은 실로 경이로운 일입니다마는 과학이 엄청 발달한 아직까지도 오늘의 달력이 정확하다고 말을 할 수가 없도록 미세하게 매년 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늘의 과학자들이 그 좋은 천체 망원경과 컴퓨터를 사용하여 해와 달과 별의 움직이는 운행주기를 정교하게 계산하였지만 사람들이 정해 놓은 1년이라는 시간이 우수리 없이 딱 떨어지는 날 수와 달 수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아마도 천지창조 후 인간이 실락원을 한 후로, 아직도 돌아가고 있을 화염검의 비밀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조화에는 그 정확한 때를 알리기 위하여 두 가지 이상의 징조를 함께 표현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창조된 우주의 모든 별들은 오늘도 그 섭리에 따라 오차 없이 돌아가건만 그 속의 지극히 작은 지구에 사는 우리들은 그 법의 수치를 찾지 못한 채 거저 우리들의 삶의 편리함을 위하여 사용하는 달력을 보완, 개력하면서 믿고 따르라고 강권하는 권력자들의 결정물인 달력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태양력의 기원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구체화하기 시작한 것은 로마시대부터입니다.

이집트 태양력의 1월이 춘분에서 시작되었듯, 태음력을 사용하였던 바빌로니아의 1월은 태양력의 9-10월에 해당하였고, 가나안식이라 불리는 유대인들의 달력으로 1월은 태양력으로 3-4월 사이가 되었으며, 중국에서 사용하는 달력으로 1월은 태양력으로 1-2월에 해당하듯 각 나라마다 자신들의 필요에 의하여 달력을 만들어서 오늘날까지 음력, 혹은 종교력으로 통용되고 있지요.

아마도 세상에서 제일 오래된 달력을 걸고 있는 민족은 요즈음 달력에 3,760년을 더하여 사용하는 유대인들일 것입니다. 유대인력으로 서기 2024년은 5,784년이 되는 셈이지요.

우리들이 사용하는 단기로는 2,333년을 더하니 금년은 단기 4357년이 되고요.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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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8
용의 기원을 찾아서(2)

                            필라델피아 Drexel University에서 찍은 악룡 사진: 한호림 제공

 

(지난 호에 이어)

 

이렇듯 상서로운 공상의 동물로, 동양에서는 절대 권력자를 지칭하는 용이 서양에서는 주로 악한 영, 사악한 짐승으로 상징되어 리워야단, 뱀, 악어, 악마, 고래, 바다 괴물, 쟈칼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었다가 요즈음에 와서는 Dragon으로 번역이 되는 것 같습니다.
Dragon이란 옛 바빌로니아에서 거대한 뱀을 숭배하는 종교예식을 나타내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서양 역사에 거대한 영향을 끼친 기독교의 유일신 야훼 신앙에서는 뱀을 사악한 짐승으로 여겨 성경에서도 “용은 모든 피조물과 피조물에 대한 으뜸을 나타내는데 사용되는 하나님의 원수”로 등장합니다.

 

용이 구약성경에서는 멸망 당하거나 하나님께 굴복하는 영물로 표현되었지만, 신약성경에서 특히
계시록에서는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요한계시록 20장 10절)고 기록된 후 그가 마침내 처분되는 시간의 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King James Version 에서는 “Dragon”이라는 이름으로 35번 나타나는데 구약에서 22번, 그리고 신약에서 13번이 나옵니다.

 

세계의 유명한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면 주로 백말 탄 기사가 창으로 날개 달린 괴물을 제압하는 그림들을 볼 수가 있는 것도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그려지는 그림이기에 동양에서 발견하는 용의 그림과는 아주 대조적인 괴물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서양에서는 “용”하면 징그럽고 두려운 괴물로 상상을 하지만 우리들, 동양의 문화권에서는 좋은 꿈을 꾸었을 때 “용꿈”을 꾸었다고 하지요.
또 진급을 하면 “용 되었다”라고들 이야기하지요.
이렇듯 상상의 동물로 친근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상서(祥瑞)로움의 대명사인 용의 세계에도 황룡, 청룡, 적룡, 백룡, 흑룡으로 나뉘어지며 매 색깔마다 나타내는 능력이 다르다고 합니다.
푸른 룡으로 불리는 2024년에 우리는 어떤 용이 되어 살아가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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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1
용의 기원을 찾아서(1)

                               강서대묘 사신도 중 청룡(Source/Photographer: 朝鮮古蹟?譜 2卷 page 116.)
                               Wikimedia Commons 자유로운 미디어 저장소에서 전재

 


나는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고 있었던 시절이 끝나며 해방이 되었지만, 오랫동안 만주, 용정에서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사업을 정리하시던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개띠생으로 만주 용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종족으로 보면 그 당시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 “조선”인지, “대한민국”인지도 모르는 무국적 자인 셈이지만 출생지로 보면 중국 사람이요, 그것도 그 당시 번성하던 도시 용정에서 태어났으니 용과 나는 아마도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인연이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아무리 용이 하늘로 올랐다는 우물이라 하더라도 용이 아닌 우물 안 개구리 같은 개띠에 지나지 않는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은 우물 안 개의 눈 밖을 벗어날 수 없기에 요즈음 세상을 풍미하는 AI의 도움으로 용의 탄생 기원을 찾아보았습니다.
용(龍)은 고대 이집트, 바빌로니아, 인도, 중국 등 이른바 문명의 발상지 어디에서나 오래 전부터 상상되어온 동물로서, 신화나 전설의 중요한 소재로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서도 큰 몫을 차지해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용은 어디까지나 상상의 동물이기 때문에 민족의 상상에 따라, 또는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이나 기능이 조금씩 달리 표현되어 왔기에, 조각이나 묘사의 표현 역시 나라와 시대에 따라 차이를 보여왔습니다.
조선전기 학자 최세진이 어린이들의 한자 학습을 위하여 1527년에 간행한 교재. ‘한자 교학서’에서는 ‘龍(용)’자를 ‘미르 룡’이라 기술하였다는 것을 보면 용의 순수한 우리말은 ‘미르’였던 것 같습니다.
미르는 물[水]의 옛말 ‘믈’과 상통하는 말인 동시에 ‘미리 예[豫]’의 옛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도 하기에 실제로 용이 등장하는 모든 문헌이나 설화 등에서 보면 용은 반드시 물과 함께 등장하였으며, 이는 항상 어떠한 사건이나 미래를 예시해주고 있었습니다.
인류 문명의 4대 발상지에서 나타나는 용은 조화능력을 발휘하였기에 모두가 원시신앙 숭배의 대상으로 떠받들었던 영물이 되어, 자연스레 수많은 신화•설화•전설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며 태양, 물 등 자연물에 정령이 있다고 믿는 원시신앙이 점차로 뚜렷한 교조(敎祖)나 문자로 표현된 교전(敎典)을 갖추며 기독교•불교와 같은 세계종교로 성장하게 되면서 용의 위상 또한 정치적으로, 또는 신앙적으로 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중국 문헌에는 용이 각 동물이 가진 최고의 무기를 모두 갖추고, 조화능력이 무궁무진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었는데 더하여, 불교적 요소가 가미되어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왔기에 거기에 우리의 창조력이 더해져 우리들이 지금 그림으로 보며 알고 있는 용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라고 추정되는 고구려의 강서 대묘에서 발견되는 벽화를 비롯하여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 대웅전 대들보에 그려진 백룡의 단청화는 우리 나라 용그림을 대표할 수 있는 큰 규모의 걸작이라고 합니다.
“삼국사기””삼국유사” “세종실록” “지리지” “동국여지승람”등에 나타나는 각종 설화 중 86편의 설화가 대체로 호교(護敎)의 상징 내지는 호국(護國)의 상징으로 용과 관련된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한국과 중국에서는 제왕의 상징으로서 “용”이라는 접두어가 따라다니게 되었고, 우리 나라에서는 주로 궁중미술에 적용되어 임금의 자리(龍座) 수레[龍駕] 배[龍?] 복장[龍袍] 등의 조형물이 생기고, 천장을 장식하는 ‘쌍룡도’ 그림이나 용좌(龍座)의 배경으로 꾸며져 있는 모습으로 요즈음 사극에도 많이 나타나고 있게 되었지요.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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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8
용이 된 빌라도


스위스! 하면 알프스산맥이 연상되는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알프스 산맥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듯이 참 많은 아름답고 험준한 산 봉우리들이 많이 있지만 전문 산악인이 아닌 우리들이 쉽게 오르며 알프스를 즐길 수 있는 곳은 베른과 발레주의 경계, 인터라켄과 Fiesch 중간 지점에 있는 융프라우요흐 Jungfraujoch , 즉 독일어로 ‘처녀 어깨’라고 부르는 해발 3,463미터(11,362피트)의 고도에 있는 고봉과, 스위스 루체른 근처에 있는 해방 2,132m의 필라투스 산일 것입니다.

 

독일어로 붙여진 이름이지만 Pilatus산의 이름은 성격에 나오는 빌라도, 예수를 사형시키라고 유대인들에게 내어주며 손을 씻은 본디오 빌라도라는 고대 로마의 장군 폰티우스 필라투스에서 유래한 산인 것입니다.
매년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방영되는 명화, ‘벤 허’에서 벤 허에게 “너는 위험한 사람이니 유대 땅을 떠나라!”고 명령한 사람이 바로 빌라도였던 것입니다.
“벤 허”가 유대 땅을 떠났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유대 총독의 임기를 마친 폰티우스 필라투스 (Pontius Pilatus)는 서기 26년~36년의 5대 총독의 재임 기간을 마친 후 로마로 돌아갔습니다.
로마 황제 디베료•가이사 치하에서 유대지역의 로마 5대 총독으로 임명된 그였지만 막상 로마로 돌아왔을 때의 로마 정치상황은 디베료 가이사의 치하 때와는 많이 다르게 급변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다’며 예수를 놓아주려 하였었지만, 유대인들의 극심한 함성에 못 이겨 최후의 사형언도를 내린 후 손을 씻으며, “나는 죄 없노라!” 하였지만 결국 예수의 비극의 순간을 잊을 수 없었던 그는 그로부터 수년 후에 칼리쿨라 황제 때에 유배를 당하여 고심하다가 자살했다고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기록하였습니다.
또 다른 주장에 의하면 네로 황제 때에 참수형을 당하였다고 하며, 어떤 전승에 의하면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순교를 당하였다고도 합니다.

 

기록으로 남겨진 역사(?)와 전승으로 전해지는 주장 중 어느 것이 더 맞는 이야기인 줄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하여튼 행복하지 못한 죽음을 맞아 땅에 묻힌 것만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 처음 묻힌 장소가 로마의 테베레 강가였다고 합니다.
그가 묻힌 후부터 강이 해마다 범람하자 유해를 수습하여 다시 묻은 곳이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이 산자락의 호숫가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산은 수시로 천둥 번개가 치는 공포의 산으로 바뀌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이 근처에 살던 당시의 사람들이 빌라도의 악령 탓이라고 믿으며 이 산을 필라투스 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그 당시에도 이 산에는 산 이름이 있었을 터인데, 전해오는 이름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 어느 교황 때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6세기에 이르러 루테른의 성직자들이 방문한 뒤 호수를 메웠다고 합니다.
요즈음 관광지에서 판매하는 책자들에 의하면 1619년의 한 연대기에는 “나는 밤마다 고요한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필라투스산의 큰 암석동굴에서 호수 반대편에 있는 풀르에(Flue)라고 알려진 다른 동굴 쪽으로 날개를 퍼덕이는 매우 밝은 용을 보았다”는 구절이 나온다고도 합니다.
또 여러 곳의 중세 전설에도 이곳에 치유력을 가진 용이 산에서 살았다고도 하니 1509년 루체른 시는 공식적으로 용의 존재를 인정하기로 하였답니다. (2011년 3월14일 천국과 지상의 중간계 라는 표제로 한국일보에 발표된 글 중에서 발췌 https://youlaw.tistory.com/292)
참 스위스 스럽지 않은 정권과 다수결의 횡포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산 정상의 한 봉우리에는 지금도 용의 동굴이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생긴 용을 보았을까요?
화가들이 그리는 용의 거의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맨 처음 용의 모양을 보았 노라며 용을 그린 사람의 그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성경의 말씀이 틀리지 않는 진리일 터인데, 사실인 것처럼 우리 눈 앞에 보이는 용의 그림은 용을 믿는 사람에게는 무엇이 될까요?
빌라도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갑작스레 승진을 하였거나 권세를 잡은 사람들 보고 우리들이 늘 하는 말 “용 되었네!”도 조금은 조심해서 사용해야 될 말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갑인년 용띠 해!
그러나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진짜 청용띠 해가 되려면 아직 조금 더 기다려야 하겠지요?
육십 갑자는 음력으로 계산이 되니까요.
음력으로 2024년 청룡띠가 시작되는 정월 1일이 요즈음 우리들이 사용하는 양력으로는 2024년 2월 10일이 되네요.
많은 천문학자들이, 그리고 수학자들이 천체의 움직임과 계절의 변화를 감안하여 어느 시대, 어느 나라마다 스스로의 달력을 만들던지 아니면 강대국의 달력을 받아와 사용하던 역사가 벌써 5000년이 넘는 세월이 되는 동안 결국 태양력과 태음력으로 양분이 되어 사용되는 요즈음이지만 사실 지금의 달력이라고 다 정확한 것만은 아님을 모든 과학자, 천문학자, 수학자들이 다 동의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을 사시는 모든 분들께서는 “빌라도와 같은 용”이 되지 마시고 아직 아무도 보지 못한 영험한 용의 좋은 기운을 받는 2024년 갑인년이 값진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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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1
60년 만에 되돌아오는 운세?(2)

 

인수봉의 추억

 

(지난 호에 이어)
그 칠흑 같은 밤에, 한번 설명을 듣고는 그 높은 산을 혼자 로프에 매달려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기적이었습니다. 아마도 깜깜한 밤, 아득히 이어진 낭떠러지가 보이지 않았기에 가능하였던 지도 모르겠습니다.
함께 하였던 친구들도 기적같이 내려왔다는 말들을 하였었으니까요.
허벅지까지 빠지도록 깊은 계곡의 눈을 헤치며 백운장에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니 다행히도 백운장에 거하던 분이 놀라며 문을 열어준 후 끓여준 더운 물과 건빵 몇 봉지로 모두 허기를 달랜 후 하산을 하다가 우이동 파출소 앞을 지날 때 경찰서로 불려 들어갔지요. 그때는 통행금지 시간이 있었거든요.

 

우리를 바닥에 꿇어 앉게 하며 “병선이가 어떤 새끼야?” 제 이름을 부릅니다.
그동안 집에서 산에 갔다가 안 돌아온다고 실종 신고를 한 모양입니다.
꿀밤 한 대를 맞은 후 통금이 해제될 때까지 파출소에 잡혀 있다가 첫 버스를 타고 모두가 무사히 귀가를 할 수가 있었지요.
집에서 아침을 먹은 후 학교에서 다시 만난 친구들이 여간 반가운 게 아니면서도 내게는 겸연쩍은 부끄러움이 있었습니다.

 

그 후 흥사단 고등학생 아카데미에 관여하며 YKA(Young Korean Academy)라는 조직에서 매월 하는 산행을 따라다니며 조금 더 산 사람을 배울 수가 있었지만 그도 잠시, 고등학교를 졸업 한 후 가족이 이민을 떠나 1967년 3월25일에 Toronto로 온 후, 국외자로 살아가는 동안, 그 언제인가 캄캄한 밤, 외진 바위산 꼭대기에서 생과 사의 경계를 함께 하였던 친구들을 기억하지 못한 나는 탕아(蕩兒), 한 평생 집 나간 탕아였습니다.
이제 아버지 집이 그리워지니 그 때의 그 친구들이 생각나지만 이제는 다 잃어버린 그 얼굴과 이름들!

 

참 구제불능의 탕아(蕩兒), 아니 탕노(湯老)가 되어버린 요즈음인가 봅니다.
이름을 잊어버린 친구들에게 외쳐 봅니다.
“친구들아! 참 고마웠다! 그 때 그 동아줄이 오늘까지의 나를 있게 하여 주었구나!”
Ps: 혹여 어디에서 이 글을 읽으며 그 날을 회상할 수 있는 친구들이 내게 연락해 올 수 있는 기적이 나타날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인왕산에서 울려온 메아리
“인수봉의 아픈 추억”을 올리고 보니 그 때의 친구들을 만나기를 바란다며 격려해주시는 분들이
많으셨습니다.
비록 60년 전의 일이었지만 그 일 자체가 여간해서는 일어날 수 없는 특별한 날에,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시간에 있었던 일이었기에 분명 함께 하였던 친구들로부터 연락이 오리라고 기대를 하며 저의 고등학교 동창들의 카톡 방에 글을 올렸었지요.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첫 회신이 왔습니다.

 

김대성형으로부터 온 짤막한 카톡 메시지였습니다.
“전병선형과 같이 인수봉 오른 게 딱 60년이네. 그때 지금 카나다에 사는 이성환도 있었을 걸.”
반갑고도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캐나다에 사는 이성환은 이 곳에서 자주 만나는 동기이기에 마침 얼마 전 만난 기회에 산 이야기를 하다가 나의 인수봉 이야기를 했을 때 “너도 아주 혹독하게 입산식을 치루었구나!”라고 말하던 산을 사랑하는 동기였습니다.

 

당장 전화를 걸었더니 “아마 나도 그 때 거기 있었을꺼야. 그러면서 그날 우리를 리드한 친구는 지금 미국, LA에 사는 이종기일꺼야”라는 답을 주었습니다.
참, 그 생사의 기로에 함께 하였던 친구가 지척에 있으면서도 서로 알아보지 못하였다는 자괴감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요?
그러면서도 “…꺼야”라는 대답에 좀 당황스럽기도 하였었지요.

그러나 “그 때의 리더는 산악반의 이종기 일거야”라는 말에 미국에 있다는 “이종기”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 LA에서 Radio Korea 를 오랫동안 운영하며 미국통인 고등학교 때의 문예신문반 친구 최영호에게 카톡을 날렸지요.
그 친구로부터 돌아온 카톡, “아마 이종기가 맞을겜니다. 그 애가 산악반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LA에 살지 않고 동부쪽 같은데, 내일 회사 나가서 찾아 볼께요”라는 긍정적인 답변이 왔습니다.

 

미국 동부에 사는 친구에게 동부의 동창들 현황을 물어봄과 동시에 한국의 동기회 카톡방에 협조부탁 글을 올린 후 미국의 “최인호”로부터 두 사람의 “이종기”라는 이름이 있다면서 두 사람의 15년 전 기록이라며 아마도 위에 있는 동기일 것이라는 소식을 보내 왔습니다.
주소를 보니 San Jose 에 있으며 전화 번호가 있기에 “동부일꺼라 하였는데…?” 미심쩍어 하며 믿져야 본전이라고, 전화를 걸어 보니 answering machine 이 답하는데….
아무래도 미국 “hello”소리가 아닌 듯해 자초지종 이야기를 한국말로 남기었지요. ㅎㅎㅎ
만약 아니면 못 알아들었을 터이지만 그래도 “Sorry” 소리를 끝으로 수화기를 내려 놓았지요.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모르는 전화번호로 전화가 왔습니다.
요즈음 하도 광고와 스팸전화가 많아 모르는 번호는 잘 안 받았었는데도 왠지 손이 가서 전화를 받으니 “혹시 전병선씨인가요?” 하는 첫 마디에 “이 종기?”라는 대답과 물음이 섞인 말이 절로 튀어나왔지요.
드디어 연락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참 이야기하는 동안, 우리 둘은 60년 전의 그 시간, 그 산 속에 있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날 우리를 인도한 산악반의 베테랑 산악인이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60년만의 해후가 아쉽게도 전화기를 통하여 이루어졌지만 이젠 모두가 70이 넘어 망팔을 하는 나이에 기억의 한 모퉁이에 있었던 추억을 되 살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미국에서 IBM 회사에서 은퇴를 한 후 건강히 평안한 여생을 San Jose 에서 지내고 있는, 산악인과는 또 다른, 멋진 컴퓨터계통의 전공자였습니다.
함께 늙어가는 우리들이기에 서로 건강히 살며 한번 재회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자며 아쉬운 전화를 끊었지요.
“고마웠다”는 말을 전할 수 있었던, 참으로 멋진 “인수봉 동기들의 환갑연”이 된 2023년 3월인 것
같았습니다.

 

이 글은 2023년 초에 계산을 잘 못하여 오가게 된 글이 되어 귀한 친구들을 1년 일찍 찾을 수가 있었지만 다시 자초지종을 찾아보니 2024년 3월이었기에 결국 2023년의 내 운세가 틀려졌던 모양입니다. ㅎㅎㅎ
그날 밤, 별빛과 눈빛 속에 손으로 더듬으며 로프 걸쇠 있는 곳으로 무사히 인도하여 준 이종기형께 감사드립니다.
아마도 모르긴 해도 인수봉이 솟아오른 후로 밤 12시경에 별빛과 눈빛만 의지한 채 자일을 타고 내려온 사람은 몇 안될 것 입니다.
더군다나 그 것이 생애 최초의 로프 타기였던 사람에겐. ㅎㅎㅎ
지금이야 웃지만.

 

그럼 2024년의 내 운세는 기적적으로 그 죽음의 순간에서 벗어났었던 그 때의 나의 운세가 되풀이될까요? 희망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하겠습니다.
2024년을 맞으시는 분들도 한번 1964년의 운세를 되 집어 보시면 어떨까요?
좋은 기억들이 많으셨다면 다시 한번 기대를 해 보시고, 혹시라도 언짢은 일들이 있으셨다면 새로 오는 50년이니 이번에는 확실히 다를 것이라고 믿으시며….
모든 분들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를 드립니다.  -천천히, 전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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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4
60년 만에 되돌아오는 운세?(1) 인수봉의 추억

 

 

십간과 십이지를 결합한 육십갑자의 원리에 따르면 용띠의 해는 매 12년마다 돌아오지만 같은 용띠라 하여도 갑진년은 60년 만에 한번 돌아오는 해이기에 그 전 해인 1963년 역시 계묘년(癸卯年)이 됩니다.
60년마다 반복되는 60갑자에는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요?
혹시…. 60년 주기로 다시 찾아오는 운세?

 

자료를 찾아보니 중국을 위시하여 우리의 선조들은 오랜 경험을 근거로 하여 매 띠마다 그 해의 특징을 만들어 놓고 그 해의 하고자 하는 일, 예를 들어, 결혼이나 사업 시작, 국제 행사나 축제 등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개인의 경험이나 신념이나 신뢰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새 해 아침 조용히 61년 전의 계묘년에 나에게 일어났었던 일을 되새기며 뒤를 이어 60년 전의 갑진년(甲辰年)을 회상하며 새로 열리는 2024년의 갑진년(甲辰年)을 소망해 보게 되었습니다.

 

61년 전인 1963년의 나 역시 2023년동안 병마와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을 하는 나처럼 힘겨운 시간이었었지요.
갑자기 시행되는 고등학교 입학 시험이 자유경쟁으로 바뀌는 덕에 아프게 중학교에서 이어지는 고등학교로 진학을 못하고 1년동안 방황하면서 나와 같은 경험을 한 12명의 남여 학생이 모였던 소위 “셋방학교”에서 서울고등학교를 나와 서울 대학생이 된 4분의 선생님을 모시고 재수를 하였었으니까요.

 

1964년 3월5일은 친구들 보다 한 살 늦게 다시 들어간 학교의 개교기념일이라 하루 공휴일이 되었습니다.
산이라곤 백운대를 서너 번 오른 게 전부였었던 내게 인수봉을 함께 등반하자는 친구들의 유혹에 겁 없이 따라 나섰습니다.
백운대 정상에서 바라보이는 인수봉에 올라 “야~호”를 외치는 산악인들의 모습이 부러웠기도 하였었으니까요.
따듯해진 햇살을 등에 받으며 5명이 우이동 계곡에 들어서서 인수봉 자락에 당도하였을 때엔 점심시간이 되어 계곡의 눈을 녹여 점심을 먹고 난 후 커다란 바위 앞에 서서 올려다 보는 인수봉은 백운대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바위 틈새를 비집으며 한참을 오르다 보니 노루꼬리처럼 짧은 봄볕은 바위에 가리우며 바위틈에 녹아 있던 물들이 슬며시 얼기 시작하니 상황이 바뀌었지만 이젠 되돌아갈 수가 없는 지점이었나 봅니다.
인솔하는 친구가 앞서 오른 후 로프를 내리면 그걸 잡고 오르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다 보니 허우대는 멀쩡하게 덩치만 컸지 경험 없던 나의 기운이 제일 딸리게 되자, 먼저 오른 친구들이 위에서 두레박질을 하여 저를 끌어 올리는 일을 하노라 고생들을 하였지요.

 

그러다가 바위 틈새가 팔이 안 닿는 곳으로 옮겨가야 할 때에는 위에서 로프에 매달린 저를 그네를 태워 왔다갔다하며 거리를 넓혀주면 겨우 틈새를 잡아 오르기를 반복하느라 정상에 올랐을 때에는 어둠이 내린 캄캄한 밤, 멀리 서울인지 인천인지의 불빛이 아득히 보이는 시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5명인 일행들이 꼼짝 없이 인수봉 정상에 갇혀 추위에 떨어야 했습니다.
한참 후 리더인 친구가 자일을 타고 내려가자고 결정을 한 후, 나보고 자일을 타 보았느냐고 묻는데….저는 그 때까지 자일을 타본 경험이 없었습니다.

 

희미한 별빛 아래 좁은 공간에서 로프를 감고 잡았다 놓았다 하는 법을 잠시 배워준 후 리더가 엉금엉금 기어서 로프 거는 곳으로 모두를 인도한 후 한 사람씩 내려간 후 또 다시 로프를 걸고 내려가기를 여러 번 반복하여 다행히도 모두가 다 무사히 걸어 내려갈 수 있는 계곡에 이를 수가 있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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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4
흔적을 찾아서(93.끝)-보스포러스(Bosporus) 해협

 

터키에서의 마지막 아침입니다. 짐들을 꾸려 버스에 싣고 보스포러스 해협 선착장으로 갔습니다. 보스포러스, “소가 헤엄 쳐서 건넜다”는 뜻을 가진 그 유명한 보스포러스 해협을 유람하러 가는 길입니다.

옛날 옛날 한 옛날에 소가 건넜기 때문에 보스포러스라고 이름 지어졌습니다. 왜 소가 헤엄을 쳐 건너게 되었을까요? 이 소는 또 어떤 소일까요? 제우스까지 들먹거려야 할 정도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늘의 신 제우스는 땅에 있는 물의 신, 이나코스의 딸인 이오와 사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이라고 해서 사랑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감히 누가 법을 만드는데….)

그런데 하늘의 여왕인 제우스의 부인인 헤라가 여신이라지만 그래도 여자이기에, 여자의 직감(?)으로 이걸 눈치채고 왠지 이상해지기 시작하는 남편 제우스의 뒤를 밟게 되었습니다.

제우스 또한 신이 아닌가요? 밀회의 장면을 잡으려 미행해 오는 헤라를 눈치채고, 사랑하던 이오를 잽싸게 송아지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이 때 나타난 헤라가 제우스에게 이 송아지를 자기에게 달라고 조르자 제우스는 난감하여 졌습니다. 못 주겠다고 하면 들통이 날 것 같고, 주자니 아깝고… 그러나 결국 부인의 성화에 못 이겨 승락을 하고 말지 않겠습니까!

허허, 못 믿을 손 남자의 사랑인가 봅니다. 아니 남자가 아니라 남신이라고 해야겠지요. 쬐금 책임감이 약한 제우스인 모양입니다. 지가 연애했으면 지가 책임 질 일이지…

신이라고 해도 남편은 부인에게 약하고, 여인인 여신에게는 그때에도 질투가 있었나 봅니다. 헤라는 송아지로 변한 이오를 백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에게 맡기고 엄중 감시를 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졸지에 소가 된 이오는 자기를 구해 달라고 애를 썼지만, 이미 소로 변한 후라 말이 안 통하여, 즉 소통하는 방법이 없던 차에, 자기 앞에 나타난 아버지 이나코스를 보고 발로 글을 써서 자기가 바로 아버지가 찾아 다니던 딸이요, 그 딸이 소가 되었음을 알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땅에 있는 물의 신의 능력으로는 속수 무책, 오히려 모르고 있을 때보다 더 괴로워하게 되자, 하늘에서 이 모양을 본 제우스는 점점 더 괴로워 견딜 수가 없게 되었지요. 그래서 헤르메스를 불러 아르고스를 죽이라고 명령을 하였던 것입니다.

헤르메스는 날개 돋친 신을 신고,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잠이 오게 하는 지팡이를 짚고 천상의 탑에서 지상으로 뛰어내렸습니다. 그 후 여차여차하여(다 쓰자면 좀 지루할 테니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르고스를 죽이고 이오를 석방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안 헤라는 더욱 복수심이 불타올라, 죽은 아르고스의 눈을 뽑아 자기 자신이 기르는 공작의 꼬리 장식으로 매달아 놓고, 이오에게는 더욱 큰 괴로움을 주기 위해서 소의 피를 빨아먹는 등에를 한 마리 보내었습니다. (다음에 공작을 볼 때에는 그 활짝 편 꼬리를 잘 보세요. 푸른 안광을 발하는 아르고스의 눈임을….)

이오는 이 등에(파리목 등에과에 속하는 곤충으로 흔히 '쇠파리'라고도 하는데, 소, 말, 사람 등 포유동물의 피를 흡혈하기 때문입니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온 세상을 다 돌아다녀야만 하였습니다.

이태리와 그리스 사이의 바다를 헤엄쳐 건넜기에 그 바다 이름이 “이오니안 해”가 되었고, 일리리아의 들을 방황하다가 흑해와 지중해 사이를 이어주는 트라키아 해협을 횡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트라키아 해협이 그 때부터 보스포러스 해협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이오의 불행을 지켜볼 수가 없었던 제우스는 부인인 헤라에게 이제는 다시는 더 안 만나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헤라의 질투를 풀어주어, 이오로 하여금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게 하였다는 Happy Ending 전설이 있으니까요. 그래도 제우스가 남신의 체면치레는 한 셈인가요? ㅋㅋㅋ

우리는 이렇게 한가하게 뱃전에서 풍광을 구경하고 있지만 우리가 탄 배를 띄워주고 있는 이 해협의 물살은 무척 세어서, 물 줄기가 해협의 윗부분은 흑해에서 지중해에 이르기 전에 작은 호수처럼 생긴 마르마라 바다(Sea of Marmara)로 흐르지만, 그 아랫물길은 마르마라 바다에서 흑해로 흘러 들어가는 여간 사나운 뱃길이 아니랍니다.

아마도 소가 헤엄을 치면서 놀린 발장구로 아랫물은 뒤로 가고 윗물은 가슴팍이 밀어 앞으로 나갔기 때문일까요? 그 위를 여유롭게 날라 다니다 가끔씩 잠수하여 고기를 물고 올라오는 갈매기는 그 속내 사정을 알기나 하는지…

서양에 있는 동양의 진주라고 불리는 이스탄불을 가로질러 흐르는 해협을, 두주간에 걸친 여행의 마지막 날, 또한 터키에서의 마지막 날 우리가 유람하는 것입니다.

우리 만을 위해서 전세 낸 배를 타고 보스포러스 대교를 지나서 새로 만든 다리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동안에 해변으로 보이는 수많은 별장들과 옛 유적들.

모두들 순간 순간 변하는 해변의 모습을 보노라 정신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보스포러스 해협에는 3개의 대교가 있습니다. 첫 번째 다리의 이름은 '보스포러스 대교'입니다. 터키 공화국 창건 50주년에 맞추어 1973년에 개통되었다는 다리로, 영국과 프랑스의 기술로 건설된 총 길이 1560m, 양 교각간 거리가 1074m인 다리입니다.

두 번째 다리는 '파티흐 술탄 메흐메드 대교'로 정복자 메흐메드 황제의 다리라는 뜻입니다. 아타튀르크 다리라고도 부른다고 합니다. 일본의 기술로 1988년 여름에 개통된,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긴 현수교입니다. 아시아와 유럽 대륙의 양단에 세워진 교각간 거리는 1090m이고 중앙수면에서 다리까지의 높이는 64m입니다.

제3 보스포러스 대교는 2016년 8월 26일 개통한 교량으로, 최근까지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이자 프랑스 남부에 있는 사장교인 미요교 다음으로 두 번째로 긴 교량이라고 합니다.

보스포러스 해협으로는 매년 5만 척이 넘는 선박들(화물선, 대규모 탱커, 크루즈 선박들)이 운행하고 있기에 대형 선박의 통행을 위하여 많은 교각을 세울 수가 없어서 힘든 공법인 현수교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동양과 서양을 양 옆으로 보면서 동양과 서양을 이어주는 두 개의 다리 사이를 갔다 왔으니 우린 이 아침나절에 두 개의 대륙을 섭렵하며 드디어 천천히

‘흔적을 찾아서’의 여정을 마치게 되었나 봅니다.

 

 

 ‘흔적을 찾아서’를 마치며

 

지난 93주간 동안 저와 함께 ‘흔적을 찾아서’ 순례의 길을 함께 하시며 격려와 성원을 보내주신 애독자 제위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천천히 열리는 사진 세상’으로 <한인뉴스 부동산캐나다>와 처음 연을 맺은 것이 2011년 12월 9일이었으니 10년하고도 4달이라는 긴 세월을 함께하여 올 수 있도록 지면을 할애해 주신 이용우 사장님과 매주 아름답게 편집을 해주신 편집위원 여러분들에게도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그 세월 동안 정말 세상은 많이 변하였던 것 같습니다.

사진이 필름에서 디지털로 변하기 시작하던 때 시작한 연재가 100회를 지속하는 동안 이제는 필름 사진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며 천천히 우리들의 뇌리에서 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진은 오히려 우리들의 일상 속으로 더 가까이 다가와서 이제는 어린 아이들까지 전화기로 사진을 찍어 주고받는 시절이 되었으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긴 저 역시 일에서 헤어나 나름대로 여행을 다니다 보니 새롭게 눈이 떠지는 풍물들과 또 그 뒤에 가리워졌던 역사들의 향기가 그냥 허공으로 흩어지는 게 아쉬워 쓰기 시작한 여행기가 전부 276회에, 달팽이를 타고 천천히 흔적을 찾아 다닌 게 93회가 되었으니, 결국 지난 10년간, 470주간을 함께한 세월이 되었네요.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을 통제한 지난 2년여의 시간은 우리들의 삶에서 잃어버린 시간들이 되고 말았기에, 되돌아볼 새로운 추억을 만들 수도 없는 어둠의 시간들 속에 정신을 말려가며 육신을 늙어가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도 그 시간 동안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힘겹게 살아온 여정들을 순례하며 오늘을 사는 저의 믿음을 되돌아볼 수 있었던 것은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동안 함께한 여러 분들에게도 좋은 시간, 좋은 추억들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함께하여 주신 <한인뉴스 부동산캐나다>의 이용우 사장님을 위시하여 모든 편집위원님들께, 그리고 여러 애독자님들께 깊이 감사 드리며 하시는 모든 일들이 형통하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2022년 3월 연재를 마치며, 천천히 전병선 배상(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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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17
흔적을 찾아서(92)-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

 

터키어로는 “카파르 차르쉬(Kapali Carsi)”, 영어로는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 “지붕 덮인 시장(covered markets)”이란 뜻입니다.

육로로 오던 실크로드의 종착지이자 지중해를 거쳐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제노바로 해로로 이어지는 해상 실크로드의 시발점이 되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물산 집산지인, 지붕 덮인 시장, 그랜드 바자르!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시장으로, 미로, 미로마다 차고 넘치는 상품들….

한마디로 와!!!!!!  엄청 큰 시장입니다.

1461년 정복 왕 술탄 메흐멧이 섬유제품을 판매하는 상점들을 유치하기 위하여 이 시장을 만들었답니다. 그 당시에는 직사각형으로 만들어진 건물에 950개의 상점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이 건물을 둘러싸며 60여개의 좁은 골목길에 4,500여개에 달하는 상점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성문처럼 생긴 입구가 21군데나 있는, 하나의 도시가 된 것입니다.

워낙 큰 규모라 방향을 잃기 매우 쉽기 때문에 몇 사람씩 짝을 지어 함께 다니다가 시간이 되면 “모이는 곳이 이 곳”이라며 조심해서 갔던 길을 되돌아오라고 주의를 줍니다. 그리고도 만약 길을 잃으면 여차여차하게 찾아오라는 주의까지 들은 후, 헤어져서 다니며 보는 골목들마다 취급하는 상품들이 다 다르게 특색이 있었습니다.

처음 개장되었을 때엔 취급하는 제품들도 엄격한 품질 검사를 해야만 하는, 터키를 대표하는 고급 시장이었답니다. 그러다 1700년에 발생한 대 화재로 커다란 손실을 입은 후, 돌과 벽돌로 재건축되며 계속 확장되어 오늘 우리가 보는 큰 시장으로 변모되었던 것입니다.

1970년부터 관광객들이 편안하게 쇼핑할 수 있도록 입구 근처의 상점들은 현대식으로 넓게 확장하였기에 옛 모습에서는 많이 변형이 되었다고 합니다마는 그 당시에 있었던 여러 개의 정문들은 아직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입구에서 시작되는 중앙통로에서 가장 눈에 많이 띄는 가게가 보석 상점이었습니다.

실제로 시장에서 가장 많은 점포는 1100여 개나 되는 보석 상점이라고 하니까요.

아무리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국민의 98% 이상이 이슬람 교도이며 이의 반 정도인 여성들이 법으로 히잡을 하며 신체 노출을 최소화하면서도 장신구는 애용한다는 이야기가 사실인 모양입니다.

둘러보는 골목길에는 Belly Dancer, 즉 배꼽춤을 추는 무희들을 위한 옷들을 입은 마네킹도 많았습니다. 

우리들에게는 "동방의 춤"이라는 뜻을 가진 오리엔탈 댄스(Oriental dance)라고 알려진 춤으로, 아랍 세계에서는 라크스 샤르키(아랍어: ??? ????, Raqs Sharqi), 터키에서는 오리안탈 단스(터키어: Oryantal dans)라고 부르기도 하는 벨리 댄스는 터키, 이집트를 비롯한 지중해 세계, 중동, 북아프리카 등에서 다산을 기원하던 고대의 제사, 종교 의식에서 유래된 것으로 9세기부터 10세기 사이에 번영을 누리던 중동, 아랍, 이슬람 세계에서 크게 성장했으며, 오스만 제국 시대에 터키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여성스러움, 관능적인 이미지를 띤 춤으로 사랑을 받던 춤이라고 하니 또 헷갈려집니다.

이런 춤을 즐기면서 왜 여성들에게 히잡을 착용하게 하는 법을 남성들이 만들어 놓았는지 말입니다. 그네들은 이슬람교도들이 아니었을까요? 아니면 포교하며 정복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가기 때문에 임신과 출산, 모성애를 표현하는 춤으로 여겨 더욱 부추기었을까요?

하긴, 요즈음에는 신체 건강, 정신 건강에 큰 효과를 주는 춤으로서 세계 각지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기도 하니까요.

그 다음으로 많이 보이는 품목은 카펫 상점이었습니다. 우리 일행이 하필이면 이런 상점들이 모인 길로 들어섰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페르시아에서부터 온 하늘을 나는 담요, 즉 Flying Carpet의 영향이어서 였던지, 터키는 질 좋은 수제 카펫으로 캐나다에서까지 유명합니다.

유리 수공예품과 도자기 또한 유명한 제품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향신료와 터키 특유의 달콤한 후식용 터키쉬 딜라이트 이지요. 그 다음으로 유명한 것이 가죽 제품입니다. 우리 일행들 중에서도 토론토에서부터 벼르던 분들이 있었을 정도이니까요.

그랜드 바자르는 하루 25만 명에서 40만 명의 관광객과 주민들이 방문해 항상 시끌벅적 하게 붐비는 실내 시장인데도 수 많은 에어컨과 잘 설계된 통풍 시스템 때문인지 공기는 쾌적하였습니다.

2014년에는 약 91,250,000명 관광객이 방문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관광명소에 리스트가 올려졌다고도 합니다.

육상 실크로드의 종점인 동시에 해상 실크로드의 시발점인 곳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되고 큰 시장이란 말이 허언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네들의 상술, 팔기 위한 전략 또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질 좋은 가죽 제품들이 있어 가격을 물어보니 우리가 약 10일 전에 들렀던 가죽 공장과는 가격이 비교가 되지 않도록 저렴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네들의 집요한 설득과, 내심 좀 씁쓰름한 느낌에 맘에 드는 자켓을 하나 입어 보았더니 결국은 내 것이 되어 버렸지요. 그것도 내 주머니에 돈이 없어 마침 그 앞을 지나던 일행의 돈을 빌려가면서까지 말입니다. 이 정도면 그네들의 상술의 경지를 알만 하지요…? ㅎㅎㅎ

값이 너무 좋아서였던지, 외상이면 황소도 잡아먹는다는 우리의 속담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흥정은 반 이상 깎는데 에서부터 시작하라는 소리 또한 허언이 아니었습니다. 다음에 가시는 분들은 참조하시기를….

지금도 관광객들이 빠뜨리지 않고 찾는 대표적인 관광명소이기도 하니까요.

 

 

 

 

bs2000
전병선
94422
10275
2022-03-10
흔적을 찾아서(91)-성 소피아 성당(Hagia Sophia)

 

기원전 27년에 황제로 즉위한 아우구스투스 이후 약 200여 년 동안 로마 제국은 기나긴 평화를 구가하며 태평성대를 이루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팍스 로마나 시대”인 것이지요.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운다고 3세기에는 군인들이 서로 황제로 칭하며 각지에서 반기를 들어 “로마 판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여 불안정한 정국이 한참 이어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민중들에게 흥미거리를 제공하며 여론을 다른 데로 돌리는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을 혹독하게 탄압하며 4명의 황제로 나누어 통치하던 중 여차여차하여 밀라노와 로마에 한 명씩, 황제가 두명으로 줄어 들었을 때였습니다.

대략 309년까지 지속되었던 "대 박해시대"를 지낸 후, 313년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밀라노에 있는 황제 리키니우스는 “밀라노 칙령”으로 완전히 기독교 박해를 끝낸 후, 콘스탄티누스 1세는 보스포러스 해협을 중심으로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비잔티움으로 로마의 수도를 옮기며 동로마제국을 키워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로마로 입성하기 바로 전날 밤, 꿈에 본 십자가 문양을 병사들의 방패에 그려 넣게 하며 벌린 최후의 혈전에서 승리하여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1세이고 보니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이 바뀐 비잔티움으로 기독교인들이 많이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후계자인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의해서 “아야 소피아”는 360년 2월 15일에 처음으로 착공되었습니다.

첫 번째 세운 교회는 지붕이 목조로 된 바실리카(Basilica) 양식의 건물로 AD 404년에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그 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명령으로 역시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유스티니안 황제 때인 532년에 히포드롬에서 마차 경기 도중 일어난 니카 반란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습니다.

유스티니안 황제는 같은 해에 성 소피아의 재건축을 시작하며, 기술자만도 100여명에 노동자는 만 명이 넘게 투입하며, 가장 최고의 교회를 짓기 위하여

아주 귀중한 건축 자재를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운반해 오며 5년 10개월 간의 공사 끝에 537년 12월 27일 완공되었습니다

1500년의 세월동안 흥망성쇠를 통하여 지도에 적히는 나라 이름이 바뀌면서 종교 또한 바뀌는 격변에도 건물 자체의 결함없이 지탱해 올 수 있도록 든든하게 지어진 교회를 보는 우리의 눈과 마음은 감탄과 놀람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떻게 1500년 전에 이런 건물을 지을 수가 있었을까? 어떻게 아직까지도 그 많은 지진을 견뎌내며 건재할 수가 있었을까? 우리의 지식과 상식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그 현실 속에 우리가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현지어로는 아야 소피아, 유럽인들은 하기아 소피아, 그리고 우리는 소피아 성당이라고 부르는데, 마치 소피아라는 성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처럼 들립니다마는 여기서 “소피아”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지혜”를 뜻하는 그리스어라고 합니다. 따라서 제대로 번역하면 “거룩한 지혜의 대성당”이 되어야 맞다고 합니다.

건물을 지탱하는 수많은 기둥들 중 녹색 대리석 기둥은 고대 7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의 성 요한 기념교회에서 멀리 있는 아데미 신전에 남은 하나의 기둥을 망원경을 통하여 보았기에 지금 여기서 그 실물을 보며 공상을 해보지만 사실 감이 잘 잡히지가 않았습니다. 하긴 이 건축물에 맞게 다시 다듬어졌을 테니까요.

그 옛날, 바울을 쫓겨가게 만든 에베소의 아데미가 거주하던 신전의 기둥이 그 당시 세계 최대 교회 기둥으로 사용되어, 그 기둥이 받치고 있는 교회 안에서 사도 바울의 서신들을 읽으며 강론하였을 테이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요!

이렇게 지어진 교회의 헌당 예식은 대단히 화려하였기에 황제가 헌당 예식에서

“오, 솔로몬이여! 내가 당신을 이겼도다!”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성 소피아 교회는 황제 대관식, 또는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등 제국의 중요한 장소로 사용되었으나 1204년에 일어난 제4차 십자군 전쟁때는 십자군들의 약탈 대상이 되었으며, 그후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후, 술탄 메흐멧에 의해 모스크로 사용될 때에는 횟가루로 덧칠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터키인들이 모자이크를 파내지 않고, 두께 5cm이상의 횟가루도 덮어버렸기 때문에 1934년에 케말 아타튀르크 터키 초대 대통령에 의해 박물관으로 바뀌고 나서, 복원공사가 이루어져 오늘날에는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모자이크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교회의 돔은 직경이 남북으로 31.87미터, 동서로 30.87미터로 약간 타원이며 높이는 55.6 미터나 됩니다. 총 면적은 7,570m²로, 로마에 있는 베드로 대성당이 지어질 때까지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로, 오스만 제국이 정복하기 전까지 그리스 정교회가 916년 동안 사용했습니다.

교회의 앞부분에 서서 천정을 쳐다보면 성모 마리아와 그 품에 앉고 있는 아기 예수가 보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금으로 만들어진 모자이크입니다.

교회가 지어졌을 때 여왕이 예배 드리러 오면, 타고 온 마차가 올라 갈 수 있도록 층계 대신에 경사진 길로 오를 수 있는 이층으로 올라가면 천국과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문을 지나게 됩니다.

그 문을 통과하여 오른쪽으로 커다란 모자이크를 보게 되는데, 순금으로 만들어진 모자이크의 중앙에 예수님, 왼쪽에 성모 마리아, 오른쪽에는 세례 요한이랍니다. 그리고 벽 윗부분 동그란 판에 금박으로 새겨진 아랍문자는 알라와 모하메드의 이름이라네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오묘한 조화… 하기야 뿌리는 한 뿌리인 것을….

화려하였으나 지금은 그 화려함을 되찾기 위한 복원작업을 위해 오히려 벌거벗겨져 철골로 버티고 선 중앙 천정, 웅장한 그 건물 속에서 예배 드리고 찬양하던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이렇게 웅장하고 크게 지었다고 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이 안으로 끌어드릴 수가 있었을까요? 무소 부재하고, 그 크기가 때에 따라서는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올 수 있도록 작아지기도 하지만, 또한 온 우주를 끌어안을 수 있도록 크신 그 하나님을 위한 집은 과연 얼마만큼 커야 할까요?

결국 우리의 욕심만큼이요, 우리의 능력만큼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밖으로 나와 하늘 높이 치솟은 4개의 첨탑들 너머로 파랗게 비추이는 하늘을 한참 쳐다보았습니다.

 

외신에 따르면 2020년 7월 10일 터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성소피아 박물관을 이슬람 사원으로 전환한다고 밝혔다.

 -중략-

터키의 명소이며 세계적 관광지이기도 한 이스탄불 성소피아 성당(Hagia Sopia)이 85년 만에 다시 모스크로 전환된다. (출처: 기독신문, 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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